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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드립니다(7).

지역 문화의 형성: 동아시아

일곱 번째 글의 주제는 지역 문화의 형성입니다.

지난 2편의 글에서는 제국의 등장과 운영 방식을 다뤘습니다. 제국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특히 권력을 한 곳으로 모으고 황제 또는 국왕이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은 국민주권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민족국가, nation-state)의 등장 이전까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국가 운영 방식이기에 그 중요성은 배가 됩니다. 그러나 제국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제국은 지배한 영역을 동질화하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중국의 진, 한 제국과 로마제국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제국에 의해 각 지역 문화권이 형성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각 지역사를 조금 상세히 다루는 관계로 4편으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먼저 동아시아입니다.


동아시아 문화권

동아시아 문화권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유교, 불교, 한자, 율령이 한중일 그리고 베트남에 전파되어 문화공동체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 학자에 의해 제안된 개념이지만 오늘날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왜 동아시아 지역에 유럽, 서아시아 등과 구별되는 문화권이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점'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가장 먼저 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봐야 합니다. 핵심부터 말하면, 동아시아는 서쪽 방향에서 문화를 받아들이기 힘든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2개의 큰 사막(타클라마칸, 고비 사막)이 중앙아시아와의 연결을 막고 있고 인도 방면으로는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이 있습니다. 북쪽 역시 사막과 광활한 기온이 낮은 시베리아 평원이 있어 왕래가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은 자연스럽게 현재 중국 본토와 만주 지역, 한반도 일본 그리고 베트남 북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현재 동아시아 지도(동아시아 지역이 아닌 지역은 회색으로 표시됨, 출처: https://guesthollow.com)
동아시아 지형도(히말라야 산맥, 타클라마칸, 고비 사막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 출처: https://guesthollow.com)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중국의 역사 전개 방향입니다. 황하 지역에서 생겨난 중국 왕조, 하나라와 상나라 그리고 주나라는 중국 황하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혼란기라 불리는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의 활동범위가 넓어져 진나라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범위는 주변 지역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했지만,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 경계를 만들고 남쪽 원정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통일 제국의 내적 안정화였습니다. 이런 방침은 한 제국시기부터 변화합니다. 한 나라는 국가를 안정을 위해 외부의 적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특히 한무제라 불리는 중국의 황제는 여기에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북쪽의 유목민족 흉노와 이웃나라 고조선, 남쪽의 베트남을 공격하여 중국의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적극적 방어 전략인 셈이죠. 이런 한나라의 운영방식은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의 기조가 됩니다. 끊임없는 중국 왕조의 확장 노력은 주변국에 영향을 주었고, 싫든 좋든 중국의 문화가 퍼져나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에 진출한 19세기까지 계속됩니다.


이제 왜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었는지에 관해 알았다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유학이 왜 동아시아에 퍼지게 되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진과 한의 제국 운영 방식이 주요했습니다. 진과 한은 지방 세력의 이탈을 막기 위해 각기 다른 방법을 선택합니다. 진은 힘으로 누르면서 황제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제했습니다(군현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는 지방의 자율권을 무시하였기에 반발을 초래하여 진을 멸망하게 합니다. 한은 좀 더 효과는 늦게 나타나지만 오래 지속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합니다. 여기서 유학이 주목받습니다.


유학은 본래 춘추전국시대 공자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제안한 사상입니다. 가족에게 적용된 상하관계, 위계질서를 국가단위로 확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부모는 왕이 되고 자녀는 백성이 됩니다. 왕은 자녀를 대하듯이 인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부모를 대하듯이 충으로 왕을 섬깁니다. 한은 이를 국가운영의 기본원리로 채택하고 전국에 유학을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한은 진나라보다 무려 400년을 더 장수합니다. 이런 유학의 효과성은 다른 국가에서도 표준이 되어 중국의 인접 국가인 베트남과 한국, 일본에게까지 전파되어 뿌리를 내립니다.


불교도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유학보다 뒤늦게 전래된 불교는 주로 한나라 이후에 등장한 제국에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유목민으로 출발하여 중국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는 불교의 '왕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을 적극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유학에서 유목민들은 예의를 모르는 오랑캐이기 때문에 유학을 선뜻 선택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불교는 현세의 삶이 과거 및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며,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 곧 미래의 행복한 삶을 약속한다는 가르쳤습니다. 불교의 이런 특성은 특히 백성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유학이 지켜야 할 규칙이라면, 불교는 정신적 위로를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불교 자체가 다신교 기반이기에 전통신앙과 결합하면서 큰 거부감이 일으키지 않은 점도 주요했습니다. 불교는 삽시간에 동아시아 전체에 뿌리내리게 됩니다.


한자는 이런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였습니다. 각 지역이 아직 문자를 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파된 한자는 토착어와 결합하여 그 지역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의 가나문자와 베트남의 추놈문자가 그런 예시입니다. 한자의 수용은 곧 지배층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문자를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직접 수용할 수 있을뿐더러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생긴 것입니다. 각별히 당시 한자는 최선진국의 문자였기에 한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최신 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 증가함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율령은 법률체계를 의미하는데, 앞서 3개 영역에 비해 영향력이 부족하며, 각 나라별로 다양하게 전개되어 이번 글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진 한제국에 이어 등장한 수당 제국도 이전 제국의 운영 방침을 충실히 따릅니다. 구성 면에서 소수의 유목민이 군사적 우위를 배경으로 다수의 농경민을 지배하는 수당이었지만 정치와 경제, 외교 방식은 이전 왕조와 동일했습니다. 다수의 농경민을 지배할 때, 이전에 구축했던 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것만큼 검증된 사례도 없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라면, 좀 더 강력한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국의 활동범위를 넓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삼국통일전쟁과, 돌궐 및 티베트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수당 제국 주변 지역 점령을 차츰 포기하게 됩니다. 일본 원정은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당은 외교방침을 바꿉니다. 주변국을 인정하고 상하관계를 설정하여 굴복시키되, 독립국가의 위치는 침범하지 않습니다. 흔히 들어본 조공책봉 질서의 성립이었습니다. 이전부터 이런 외교방식이 생겨났지만, 당시기에 가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는 꽤 긴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 시기 중국의 당, 한반도의 발해와 통일신라, 일본의 나라 시대는 전쟁이 멈추고 서로 교류가 활성된 시기였습니다. 드디어 동아시아 문화권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인도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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