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드립니다(8).
지역 문화의 형성: 인도
by 세상을 읽는 지식 소개 Jan 3. 2025
인도 차례입니다. 오늘날 세계 1위 인구수와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가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끈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인도에 관한 정보도 국내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인식도 파편적이며, 몇몇 단어 정도로만 대표됩니다. 카레, 힌두교, 불교, 간디 등입니다. 하지만 인도의 과거를 훑어보면,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과거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고 흥미로운 사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도 지역 문화가 생겨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인도는 인도 아대륙(반도)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지금은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등으로 나뉘어 있으나 인도 아대륙 전체 관점에서 보면, 인도가 주로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은 서쪽, 즉 서아이사 지역입니다. 동쪽은 히말라야 산맥으로 막혀있고 남쪽은 인도양으로 막혀 있습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바다는 일종의 장벽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인도는 서아시아 지역과 많은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일전에 언급한 인더스 문명의 두 도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도 서아시아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인도 지역에서 남인도 지역으로 가려면 데칸 고원을 지나야 했습니다. 데칸 고원은 평균 해발 600m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기에 지역 간 교류를 막는 자연 장벽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1600년대 이전까지 인도는 북인도와 남인도의 역사가 각각 따로 전개되었습니다.
인도 지형도(히말라야 산맥, 데칸 고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pinterest.com)
서쪽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은 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변인이 모두 서쪽에서 유입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도 고유 종족인 드라비다 종족을 정복한 아리아 인,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 굽타 왕조를 멸망시킨 에프탈족과 이슬람교도의 전파는 모두 서아시아 방향에서 왔습니다. 이런 흐름은 유럽의 신항로 개척(대항해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서아시아와 결부된 역사 진행의 결과로 인도는 동아시아보다는 서아시아와 문화적 공통점이 많습니다. 또한 인도 역사의 주요 무대 역시 북인도 지역이었습니다. 그럼 북인도를 중심으로 고대 인도 문화의 형성 과정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인더스 문명 이후, 인도 지역에 변화를 몰고 온 시점은 대략 기원전 1500년경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아리아인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북인도로 들어와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아리아인들은 인도 역사에 여러 발자취를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브라만 교와 카스트 제도가 오늘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신교이자 베다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브라만 교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은 윤회 사상입니다. 전생의 삶은 현생과 연결되어 있고 현생의 삶은 다시 후생의 삶과 이어집니다. 브라만 교는 이러한 생각을 기반으로 아리아인의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또한 사람을 직업 또는 계급으로 나뉘어 살아가게 합니다.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성직자)부터 크샤트리아(왕족, 군인), 바이샤(농민), 하층민인 수드라(천민)까지 위계를 설정하여 현실에 순응하게 합니다. 이런 계급제도를 카스트(바르나, 종성) 제도라고 합니다. 카스트 구분은 엄격하여 지켜져 현재도 그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회사에서도 고위 임원 중에 한 명은 실력이 아니라 카스트에 의해 뽑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원전 320년 경,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인도에 들이닥칩니다. 난생처음 보는 군대와 전술(사각형 모형의 밀집 보병전술)에 의해 인도는 고전하지만,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물리칩니다. 그리스 군대가 철수하자, 인도인들은 분열된 인도를 하나로 묶을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가 이끄는 마우리아 왕조가 탄생하게 됩니다(제국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를 거의 통일했지만,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평화와 통합의 필요성이 간절했고, 브라만 교를 극복할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석가모니(부처)가 창시한 불교가 주목받게 됩니다. 수련과 고행을 통해 해탈하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의 사상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이끌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습니다. 때문에 인도의 마우리와 왕조와 그 뒤를 이은 쿠샨 왕조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했습니다. 이런 노력은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불교가 퍼져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가 후원한 불교의 종류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상좌부 불교, 후자는 대승불교/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의 불교입니다)
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영역 지도, 보라색이 마우리아 왕조의 초기 영토입니다. 출처: 세계사 백과사전)
하지만 힌두교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브라만 교를 발전시킨 힌두교는 다신교 개념과 아바타라(신이 다른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나는 것) 개념을 활용하여 불교까지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카스트 개념은 비록 계급제이지만, 직업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전근대 사회가 유지되는 이상, 쉽사리 무너뜨리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힌두교는 다시 부흥에 성공했고 인도의 3번째 왕조라 불리는 굽타 왕조시기에 불교 대신에 대세 종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힌두교의 강력함은 기원후 700년대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교과 다신교를 믿는 힌두교의 대립은 불가피했고 이런 갈등은 인도 역사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이슬람교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힌두교도가 추구하는 사회제도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해당 시기부터 이어진 종교 간 갈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파키스탄과 인도의 대립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남인도 지역은 북인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이들은 데칸 고원에 가로막혀 북쪽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고 군사적 압박도 덜하였습니다. 이들이 택한 진출방향은 바닷길이었습니다. 남쪽 지역에 세워졌던 왕조들은 대부분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지역으로 무역로를 개척하였습니다. 물론 원양항해보다는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연안 항해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나 힌두교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흔적들이 여러 사원들에 남아 있습니다(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인도 지역 문화권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면, 종교와 언어의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인도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했었던 공간입니다. 힌두교의 신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떤 조사 결과에서는 신의 숫자가 자그마치 3억이라고 합니다. 언어 역시 산스크리트어를 포함하여 45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공용어만 22개). 그렇기에 인도 문화의 성격을 동아시아처럼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양성 그 자체가 특징이니까요. 게다가 인도는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기 전까지 한 번도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이 인도 역사를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인도의 국가 기념일에 진행하는 각 지역별 퍼레이드를 보면 확실히 체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소개한 인도 이야기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3번째 무대 서아시아 지역으로 가보겠습니다. 주요 키워드는 이슬람교가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