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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 드립니다(10).

지역 문화의 형성: 유럽

지역 문화의 형성 4번째 대상은 유럽입니다.

유럽은 다른 지역에 비해 연구성과가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국가수와 특징도 다양하고요. 일일이 다 나열하려면 엄청난 분량과 시간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국가들끼리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이 많아 이해를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다양함의 매력에 빠져 유럽사에 흥미를 느끼는 분도 많지만, 그 복잡함에 흥미를 잃는 분도 상당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저는 로마의 후계자들, 기독교, 봉건제라는 키워드로 그 복잡함을 해결해보려 합니다. 그럼 다른 지역 문화 소개와 같이 지리, 주요 역사 흐름부터 시작합니다.


유럽의 지역 문화 형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지중해라는 바다입니다. 지중해는 다른 대양(태평양, 대서양)과 달리 항해하기가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발달된 문화는 어렵지 않게 그리스로 전파됩니다. 그리스 지역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생활공간을 확장합니다. 여기에 주요한 역할을 한 국가는 페니키아였습니다(로마 제국과 포에니 전쟁을 벌인 나라). 특히 페니키아의 알파벳 발명은 이후 유럽 각지에서 사용하는 문자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의해 지중해의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지중해의 중요성은 변함없었습니다. 유럽이 신항로 개척에 나서 성공을 거둔 16세기까지 지중해는 서아시아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유럽의 지형도(지중해와 알프스의 산맥의 위치가 핵심이다. 출처: 위키백과)

지역 문화 형성의 두 번째 공헌자는 로마제국입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뻗어나가 지중해를 점령한 로마는 북방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당시 갈리아(오늘날 프랑스)와 게르만 영역(지금의 독일) 그리고 브리타니아(영국)까지 뻗어나가면서 로마는 유럽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엮는 데 성공합니다. 이런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은 막대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던 흐름을 단번에 바꾼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가 위치한 평원은 로마 문화가 적극적으로 이식된 곳이었습니다. 이는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 프랑스 지역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는 주요 배경이 됩니다.


중세(Middle Age) 시대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탄 기사와 성, 십자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중세시대입니다. 한 번씩은 들어본 '중세'라는 표현은 유럽에서 로마제국의 멸망 이후(476년)부터 신항로 개척(1492년) 이전까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 시기에 유럽 각지에서는 로마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뒤섞여 저마다의 특징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과 같은 나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좋게 말해, 다양해지는 것이고 어렵게 말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어렵긴 하지만 이 시기에도 주요 역사 흐름은 존재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로마의 후계자들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 말기인 기원후 300년대, 동유럽 지역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훈(Hun)족입니다. 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훈족은 유목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서유럽을 휘저으며 게르만족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기병의 우위를 이길 수 없었던 게르만 부족들은 결국 안전한 곳, 로마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입니다. 물밀듯이 남하하는 게르만족을 막을 수 없었던 로마제국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동과 서, 2개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의 정치, 군사, 행정의 중심지는 동유럽으로 이미 옮겨갔었기에 로마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서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지역(이탈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등)에 정치적 무질서가 생긴 겁니다.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행정체계에 익숙하지 못했기에 이런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몇몇 게르만족은 파괴를 일삼기도 했습니다(반달족). 공공질서가 붕괴된 혼돈의 형국에서 한 국가가 후계자로 주목을 받습니다. 바로 프랑크 왕국입니다. 프랑크 족이 세운 이 왕국의 왕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존 원주민과 융합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이민족들로부터 기독교의 수호자로 활약합니다.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내고 교황에게 땅을 선사하면서 말이죠. 그 결과 정치군사적 후원자가 필요했던 기독교회(로마 교황)는 프랑크 왕국의 국왕(카롤루스 대제,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라고 부릅니다)을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여 로마제국의 후계자로 인정합니다.


기원후 1000년경 유럽의 지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영국이 주요 국가였다. (출처: 지도 왼쪽 하단)

프랑크 왕국은 얼마 못 가 분열되었지만, 로마제국의 후계자 타이틀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가가 차지합니다. 분열된 프랑크 왕국 중 독일 지역에 있던 프랑크 왕국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으로 변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여러 귀족들(제후)이 연합으로 만들어진 제국이었기에 매번 왕위다툼과 분쟁에 휩싸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대신에 이웃나라에 세워진 프랑스 왕국이 로마의 후계자 역할을 자처합니다. 특히나 프랑스는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였고 로마 교황청과 지속적인 끈끈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혼란의 시기에 기독교는 유럽을 안정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먼저 교회는 각 지역별 교구를 재설치하고 확장하여 무너진 행정체계를 복구합니다. 또한 당시 지식인이었던 교구장, 사제들은 행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또한 혼란의 시기에 대중들의 정서적 피난처가 되기도 하죠. 이외에도 교회는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게르만 문화를 중화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틈만 나면, 결투를 했던 관행을 줄이거나 적어도 일요일(안식일)에는 금지시키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중세 시기를 암흑기(Dark Age)라고 부르면서 문화가 쇠퇴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자세히 보면, 중세 교회는 학교를 운영하고 대학을 설립하여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수도사들은 필사를 통해 옛 문헌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전도를 통해 유럽 전체를 기독교 왕국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세속 권력과 교회의 대립도 꽤 발생했습니다.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꿇은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오늘날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기독교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중세를 '신앙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키워드 봉건제입니다. 봉건제(feudalism)는 그 뜻을 보면, 토지 계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왕 또는 상급자가 토지를 하급자에게 나눠주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계약입니다. 토지를 받은 자는 흔히 영주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땅을 장원이라고 합니다. 장원에는 농노가 있습니다. 농노는 농사를 지어 영주에게 세금을 바칩니다. 영주는 그 대가로 농노를 보호해 주죠. 물론 영주와 농노는 계약관계가 아닙니다).


땅을 매개로 하는 봉건제는 당시 혼란을 반영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원래 봉건제는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 기사들에게 땅을 주는 제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후 800년대에 익히 들어본 북쪽으로 노르만 인(바이킹)들이 내려오면서 가속화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야 했고 중앙 정부는 이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합니다. 대신에 중앙정부는 계약을 맺어 각 지역에 있는 영주 또는 기사에게 방어를 맡기고 그 땅의 지배권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 전역에 봉건제가 확산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후계자 국가들, 기독교 세계, 봉건제는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확고히 자리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이 이를 종합하여 보여줍니다. 십자군 전쟁입니다. 약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기독교에 가지고 있던 신념을 보여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유럽은 십자군 전쟁 이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듭니다.


수많은 유럽 각국의 역사와 인물들을 제외했는데도 분량이 꽤나 나오네요. 이제 유럽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제는 각 지역별 문화를 뒤흔든 유목민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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