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 끄적-23. 라디오

별밤에서 푸른 밤까지.

by 선호

창밖의 별들도 외로워 노래 부르는 밤

다정스러운 그대와 얘기 나누고 싶어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는 이문세 님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자랐다.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90년대 중반 사춘기 소년의 감수성은 별밤으로 채워졌다. 매일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이불속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가족들 몰래 숨죽여 울고 웃다가 잠들곤 했다. 엽서에 사연을 적어 사서함으로 보내기도 하고 별밤캠프나 잼콘서트 같은 행사에 참가신청을 매년마다 열심히 해도 한 번을 당첨되지 못하는 불운의 청소년이었지만 별밤지기 이문세 님의 목소리는 내 무미건조한 사춘기를 적셔주는 단비였다. 1997년 중학교 2학년 겨울, 이문세 님의 마지막 방송을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바통을 이어받은 이적님 방송까지 들으며 패닉에 빠져 살았고, 수능을 앞두고는 정지영 님의 스위트 뮤직박스를 들으며 공부를 하곤 했다


대학 진학 후부터 라디오를 듣지 않다가 전 직장에서의 하루 일과 중 서울 시내 지점들을 도는 업무를 하면서 다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하루에 3시간 정도의 시간은 운전을 하며 라디오와 함께였는데 도착지에 다다를 때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거나 재미있는 사연이 나오면 일부러 한 블록을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지만 반쯤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기에 아침마다 업무배정 시간이 되면 지점 순회 업무를 나한테 시켜주기를 바라곤 했다. 호은을 낳고 산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면서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늘어나서 참 좋았다. 뒤늦게 입문한 종현 님의 푸른 밤은 본방을 못 들어도 팟캐스트 다시 듣기로 찾아들으며 힘든 하루를 버틸 수 있았다


제주에서 배송일을 하기에 하루종일 트럭을 타고 다닌다. 당연히 하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배달을 한다. 정지영 님의 '오늘아침'으로 일을 시작하고 이상순 님의 '완벽한 하루'로 일을 마무리한다. 청취자들의 사연도 듣고 모르던 노래도 듣고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끝나곤 한다. 요즘은 라디오 사연을 듣다가 공감이 가는 부분이 나오면 지금 글쓰기의 주제로 영감을 얻어내기도 한다. 나름 노래 많이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던 좋은 노래가 나오면 바로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곤 한다. 하루종일 혼자 일하는 나를 챙겨주고 거들어 주는 친구로 라디오가 되었다. 제주지역 라디오 방송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고 사연 채택율도 높아서 잠깐 쉬면서 보낸 내 문자를 DJ가 읽어주면 다시 파이팅 해서 일할 힘이 샘솟는다.


유튜브나 인스타, ott 같이 눈으로 보는 것들이 너무 많다 보니 눈도 피곤해지고 뇌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느낌이다. 짧은 영상을 계속 바꿔가며 도파민이 솟아나기를 바라기보단 라디오를 들으며 그 목소리에 상황을 상상하고 공감하며 얻는 세로토닌이 더 좋다. 호은에게도 천천히 상상하며 느끼는 즐거움으로 얻는 세로토닌의 기쁨을 가르쳐 주고 싶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수고했어요. 정말 고생했어요.

그댄 나의 자랑이죠.


문득, 푸른 밤 종현 님을 듣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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