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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일기-08. 시장

내 마음속 정겨운 쇼핑몰

by 선호

원래는 대형 마트보다 시장을 더 가곤 했다.


사춘기가 다가오던 6학년 즈음해서 주말이면 어머니는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안양 시내의 중앙시장에 가곤 했다. 집에 우리 형제 알아서 놀고 있으라고 하고 어머니 혼자 가시곤 했는데 동생도 혼자 잘 있을 나이가 되고 나도 고학년이 되었으니 짐꾼으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장을 돌며 일주일치 장을 한 번에 보고 나면 양손 가득 온갖 식재료로 가득 찬 검은 봉지들을 들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자반고등어 같은 생선류를 사는 날엔 생선 비린내가 버스에 퍼져 다른 승객들이 눈을 찌푸리며 눈치를 주곤 했다. 본격적인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부모님과 거리 두기를 하고 더 이상 시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겨울 김장철이 되면 아버지손에 이끌려 김장재료들을 사러 시장으로 가곤 했다. 새벽 시장에 가서 김치 재료를 사고 나면 시장 한쪽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는 식당에 들러 순대국밥을 먹곤 했는데 사춘기 소년의 반항기 넘치는 질풍노도를 잠재울 만한 맛을 가졌기에 새벽에 끌려감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어머니랑 시장에 가면 떨어지는 콩고물이 없지만 아버지와 함께 가면 항상 맛있는 음식들을 얻어먹기에 아버지와의 장보기는 언제나 기다리는 일이었다.


아버지와는 주로 황학동 도깨비 시장이나 동대문 평화 시장을 가곤 했다. 동묘 역이 없었던 시절이라 동대문 운동장 역에서부터 황학동까지 한참을 걸어 다니며 장을 봤다.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득 차서 행여 아버지 옷을 놓칠까 걱정하며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아버지는 맛있는 막창과 칼국수를 사주시고 미국 과자도 사주시곤 해서 몇 시간을 힘들게 걸어도 행복한 나들이였다.


집에서 독립을 하고 얻은 첫 자취방에서 5분 거리에 수유시장이 있었다. 나름 큰 시장이고 온갖 식재료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장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오곤 했다. 휴일 전날 과음을 하면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기보다 숙취에 시달리며 비틀대더라도 시장에 가서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쓰린 속을 치료하곤 했다. 닭 한 마리라는 음식을 알게 된 곳도 광장 시장이었고 내 생애 최고의 청국장을 먹은 곳도 충무로 인현시장이었다. 쏭과 결혼하고 연신내 산동네로 이사했을 때 연신내역에 붙어있던 연서시장에서 장을 보거나 외식을 하곤 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여기저기 나갈 돈이 많아지다 보니 카드값을 내고 나면 남는 현금이 없었다. 지금도 시장에서 카드 쓰기는 어렵기도 한데 10년 전에 시장에서 카드를 쓸 수는 없었기에 결국 장을 보러 가는 발걸음은 점점 대형마트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아쉽지만 시장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제주에도 시장이 여러 곳이 있다.


대표적인 제주 오일장과 동문시장이 있어 제주 이주 초반에 몇 번 가보긴 했지만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많고 활기차기는 하지만 주로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한 음식이나 기념품들 위주이고 정작 필요한 것들은 많이 없음에 결국 시장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를 가게 된다. 의외로 유명한 시장 말고 그 근처에 작게 있는 시장들이 내 눈에 더 들어오곤 한다. 인생 간짜장과 막창 순대를 먹었던 서문 시장이라던가 끝장나는 하드코어 순댓국을 먹었던 보성시장을 나는 더 좋아한다. 그렇게 작은 시장 안 좌판에서 할머니들께 채소를 조금씩 사고 하면 어릴 적 생각도 나고 기분이 참 좋아지곤 한다. 새벽 시간에만 잠깐 열리는 제주항 근처 서부두 수산시장은 대형마트에선 생각도 못할 가격으로 생선을 살 수 있기에 토요일 쉬는 날 종종 가보곤 한다.


오늘 서귀포 올레 시장 안에 있는 집들에 배송을 했다. 서귀포 최대 시장이다 보니 차가 들어가기 힘들어 멀리 주차를 하고 수레를 끌고 시장 안으로 들어가 이 집 저 집 배달을 하는데 동문 시장과 다른 분위기의 활기가 느껴졌다. 물론 올레 시장에도 관광객들이 많지만 도민의 비율이 더 높아 여기저기에서 제주어로 흥정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한 달에 한 번 배송을 오는 데 올 때마다 뭔가 먹거리나 생필품들 하나씩은 사가곤 한다. 지금 한창 유행 중인 꽃무늬 조끼도 유행하기 전에 이미 만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시장에 걸려있었고 가볍게 잠옷처럼 입는 바지도 너무 싸서 다섯 개씩 사기도 했다. 지난 1월, 배송을 왔다가 시장 중간에 돌판으로 김을 구워서 파는데 냄새가 좋아 사왔더니 쏭이 맛있다고 난리다. 지난달에도 열 봉을 넘게 사 왔는데 금세 다 먹고 오늘 또 잔뜩 사가지고 왔다. 로켓배송에도 있고 대형마트에도 있는 대기업 김도 좋지만 결국 시장 돌판에서 구운 김을 찾는 쏭을 보며 역시 우리는 시장체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아날로그가 더 좋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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