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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일기-09.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지는 못했지만...

by 선호

아버지는 영화를 참 좋아하셨다.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서 봤던 첫 영화는 '보디가드'였다. 지금 검색해 보니 15세 관람가이지만 영화가 개봉한 연도는 1992년인 것을 보니 15세가 되기 전인 듯하다. 영화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 휘트니 휴스턴과 케빈 코스트너가 키스를 하면서 들려오던 '웬 다~~~ 이아~~~' 하는 노래는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액션 영화를 워낙 좋아하셔서 일을 나가지 않는 날엔 항상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영화를 보시곤 했는데 18세 빨간딱지가 붙은 영화가 아니면 나도 아버지 옆에 붙어서 보고 성룡이나 척 노리스의 액션을 따라 하곤 했다. 어머니는 드라마를 좋아했지 영화는 좋아하지 않으셔서 두 분이 극장 데이트를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타이타닉이 개봉해서 난리가 났을 때 부모님과 극장에 갔었는데 깜깜하고 답답하다고 나가버리시는 어머니를 보시며 '내가 다시는 니들 엄마 극장에 안 데리고 온다'라고 투덜대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웃음으로 남았다. 2000년대 이후, 컴퓨터 그래픽으로 가득 찬 영화가 극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이제 진짜 영화가 없는 것 같다며 더 이상 극장에 가지 않으셨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나도 영화 보는 것을 즐겨한다. 유명한 영화인 분들이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며 영화인의 꿈을 꾸었다고는 하지만 그분들이 봤다는 이야기 하는 영화는 거의 다 거장들의 예술영화들이고 나야 스릴 넘치는 액션과 화려한 효과로 가득 찬 상업영화였기에 영화인에 대한 꿈은 가져보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즐기는 관객 1로 만족했기에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가 개봉하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올드보이'가 개봉할 때 '반지의 제왕 2'를 선택했고 한창 유행했던 '두사부일체'나 '달마야 놀자'같은 조폭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곤 했다. 영화 세 편을 내리 상영하는 심야 영화도 모두 블록버스터였기에 새벽에서 극장을 나올 때는 밤새 도파민이 너무 분비됐는지 기진맥진해 있었다. 유일하게 봤던 예술 영화가 이창동 감독님의 '오아시스'였는데 그것도 썸 타던 친구가 보러 가자고 해서 갔던 거였다. 여느 상업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뭔가 우울해져서 극장을 나와 썸녀와의 데이트고 나발이고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다.


대학로에서 공연일을 하면서도 영화 보기는 그치지 않았다. 오전 아동극이 끝나고 저녁 성인극이 시작하지 전 몇 시간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공연 스텝들끼리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길에서 파는 불법 DVD를 사서 공연장 프로젝터로 한편씩 보곤 했다. 나중에 자린고비 같았던 공연장 사장에게 프로젝터 함부로 쓴다고 혼나기는 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추억이다. 대학로에 있던 독립영화 전용 극장에서 봤던 영화 '원스'에서 주인공 글렌 한사드가 피를 토하듯 부르는 'Say it to me now'는 아직도 내 인생곡이기도 하다. 쏭도 영화를 좋아하기에 연애하면서 극장에 많이도 갔다. 호은을 낳고 나서 몇 년을 못 가다가 조금 자란 후부터 처갓집에 가면 장모님께 맡기고 둘이 극장데이트를 하곤 했다. 분리불안이 있던 호은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잘 견뎌줬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고 명절마다 하는 극장데이트는 잠깐의 육아해방이자 연애할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기에 참 좋았다.


제주에 오고 나서 먹고살기 바빠서 극장에 갈 여유도 없이 살았다. 내가 시간이 나면 쏭이 시간이 없고 쏭이 시간이 나면 내가 일을 하러 가야 해서 지난 9년간 제주에서 둘이 극장에 가는 일은 한 손에 꼽을 정도이다.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때는 쏭과 호은이 긴 외출을 하는 날에 맞춰 혼자 극장에 가서 보곤 한다. 드물게 호은이 캠프를 가거나 해서 시간이 나면 극장에 가자고는 하지만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따져서 작품을 고르는 쏭이 아무 영화나 보고 싶지 않다고 하기에 영화 고르기가 쉽진 않다. 아무거나 보면 되지라고 말하기엔 혼자 영화 보러 갔다 왔던 과거가 미안하기에 되도록이면 쏭이 보자고 하는 영화를 보곤 한다. 그렇다고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기에 블록버스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재미는 있기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며칠 전부터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을 보고 싶다고 쏭이 노래를 불렀다. 나도 보고는 싶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계속 못 보고 있었다. 평일에 쉬는 쏭이 혹시 배송이 일찍 끝나 4시 전에 퇴근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면 4시 반 영화를 보고 호은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이를 악물고 점심이고 쉬는 시간이고 다 건너뛰고 배송을 해서 4시 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급하게 씻고 극장으로 달려가 영화를 봤다. '역시 봉준호야!'라는 칭찬이 절로 나오는 영화였고 호은보다 조금 늦게 집에 왔지만 잘 기다려준 아들이 기특했다. 오랜만에 함께 보는 영화 자체도 좋았지만 상영되는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쏭과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 더 좋았다. 집에 오는 내내 조수석에서 감독과 배우와 스토리에 대해 조잘대는 쏭의 말을 들으며 집에 가는 길이 좀 더 멀어져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혼자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왠지 연애세포가 살아난 듯한 기분이었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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