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십분 일기-10. 수학여행

여행의 즐거움을 망치는 법

by 선호

첫 수학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초등학교 6학년에 처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었다. 수학여행비가 10만 원이었던 기억인데 너무 비싸 못 갈 줄 알았지만 수학여행은 보내줘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지 말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생활비 통장에서 돈을 꺼내 주셨다. 없는 살림에 죄송스러운 마음도 잠시, 태어나서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고 처음 보는 제주의 돌하르방이나 초가집 같은 것 등 모든 것이 신기했다. 집 밖을 나와 처음 해보는 외박이어서 더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2박 3일간의 수학여행을 하면서 쓰라고 받은 용돈 3만 원을 혹시나 잃어버릴까 주머니에 꽁꽁 숨겨놓고 다녔다.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다가 성읍 민속촌에 가서 전통적으로 뒷간에서 키운다는 흑돼지도 처음 보고 화장실에서 키우는 돼지가 그렇게 맛있다는 말에 오히려 입맛이 뚝 떨어졌던 기억이다. 그렇게 보고 점심을 엄청나게 넓은 식당에서 돼지 불고기를 먹었는데 가뜩이나 떨어진 입맛에 맛도 없고 냄새나는 고기에 얼마 먹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학여행 같은 단체 관광객 전용 식당이었던 것 같다.


점심 식사 후 아이들을 모아놓고 제주 전통 집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전통 초가집을 짓는 방법이나 옛 생활 방식등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전통 꿀 이야기가 나왔다. 강의를 하던 선생님(아마도 가이드?) 옆에는 박스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꿀 용기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제주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토종 한방꿀이라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꼭 사야 한다는 말에 효심이 깊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손을 들었다. 물론 그중에 나도 있었다. 용돈 3만 원 중 절반이나 내야 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꿀을 사서 가방에 잘 모셔두었다. 다음 코스에서는 알로에 밭에 가서 서울에는 이런 식물이 자라지 않지만 열대 섬인 제주에는 알로에를 키울 수 있다고 먹어도 보고 얼굴에 발라도 보는 체험을 했다. 이렇게나 피부에 좋은 알로에를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위해 화장품으로 만들었다며 선물로 사면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는 말에 만 원짜리 알로에 화장품을 샀다. 그 이후에도 돌아오는 날까지 가는 코스 안에서 그 선생님은 온갖 기념품을 사라고 부추겼지만 돈이 모자라서 사지 못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내민 토종꿀과 알로에 화장품을 보고 칭찬을 해주실 줄 알았던 부모님은 아무 말도 없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토종꿀이라 사온 꿀은 쌍화탕 가루가 섞인 설탕꿀이었고 화장품 역시 바르면 줄줄 흘러내리는 싸구려였다고 한다. 그래도 부모님 생각해서 사 왔다고 혼이 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어디 가서 쓸데없이 사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중학교 때는 속리산으로, 고등학교 때의 수학여행은 경주였다. 속리산은 기억이 아예 나지 않을 정도로 추억이 없었지만 경주는 90년대 대표 수학여행지답게 불국사와 첨성대, 석굴암을 가고 신라시대 능도 보고 좋았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쇼핑 타임이 시작되곤 했다. 예전 제주에서 팔던 전통 꿀은 초가집 모양의 용기에 담겨 있었는데 경주에서는 첨성대 모양의 용기에 담긴 꿀을 팔았다. 다보탑과 석가탑 모양의 모형 세트를 팔기도 했다. 꿀은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모형 세트들은 신라의 얼을 되새기기 위해 사라고 가이드는 열변을 토했지만 제주에서 크게 당한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박혀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효심을 자극하면 넘어가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머리가 어느 정도 여문 고등학생들에게 어떻게든 팔아보겠다고 했지만 예상했던 계획에 비해 많이 팔지는 못했다 보다. 쇼핑 타임이 끝나고 넘어가는 코스 내내 불친절했던 가이드와 어디 영화 속 수용소에서 나올법한 호스텔의 식사는 오죽하면 학교 선생님들까지 나서서 따질 만큼 엉망이었다.


그렇게 수학여행 온 우리들에게 강매하던 어른들은 후에 단체 관광객들을 등쳐먹는 사람들로 뉴스에 나오며 전통적인 관광지가 외면받는 큰 이유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성읍으로 이사일을 하러 갔다. 오전 내내 이삿짐을 싸고 차에 싣고 하며 끝내고 점심을 먹으려 하다가 바로 근처에 대형 식당이 있어서 이사팀 모두 갔다. 주차장도 엄청 크길래 여유 있게 띄엄띄엄 세우고 식당에 들어가려 했더니 식당 주인이 나와 곧 단체가 올 예정이니 차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세워 놓으라고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하며 그렇게 세워놓고 들어간 식당 안은 몇백 명도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엄청 넓은 식당이었다. 원래 단체 예약 손님만 받는데 오늘 단체 오는 김에 받아준다는 말에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앉았다. 메뉴는 돼지 불고기인지 두루치기인지 그 중간 어딘가의 음식이었던 듯하다. 반찬들은 짜고 싱겁고 시고 공깃밥은 반만 채워져 있었지만 왔으니까 그냥 먹자 하며 고기를 익히는 동안 단체 손님들이 왔다. 외국인 관광객 30여 명이 와서 식사를 시작하는데 뭔가 삐걱대는 듯했다. 식사에 포함되기로 했던 국이 없냐는 가이드와 당당하게 없다고 말하는 직원 간의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식탁에 앉아 눈치를 보던 관광객들은 알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들끼리 조용히 저 외국인들은 'Traditional Korean Barbecue'를 먹으러 온 것으로 알 텐데 불쌍하다고 얘기하면서 식사를 마치고 도망치듯 나왔다. 일이 끝나고 이상하게 식당이 낯이 익어 검색을 해봤더니 그 옛날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왔었던 식당이었던 곳 같다. 왠지 내가 그 관광객들에게 미안했다. 저 사람들도 나중에 설탕 꿀을 전통꿀로 속여 강매당하러 갔으려나 하는 걱정이 절로 들었다. 저런 장사꾼들이 외지사람들로 하여금 제주를 외면당하게 만드는 것일 텐데 라는 생각과 안 망하는 것 보면 아직 배가 덜 고프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뉴스에서는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줄어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떠들지만 아직 멀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던 날이었다.


씁쓸했다.

keyword
이전 10화십분 일기-09.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