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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분 일기-11. 꽃

세상 쓸데없지만 가장 효과가 좋은 선물(?)

by 선호

꽃을 사는 것은 세상 쓸데없는 일이다.


부모님께 처음으로 드린 꽃은 어버이날 학교에서 색종이를 자르고 접고 해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 꽃이다. 여느 부모들이 그러하듯 자식 녀석이 학교에서 어버이날이라며 카네이션 꽃을 만들어왔다고 가슴에 달아드렸을 때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월급날이 아닌데도 어머니의 기분이 좋으셔서 저녁에 온 가족 외식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매년 종이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다가 고학년이 되고 동생과 오락실 가서 쓸 돈 백 원, 이백 원을 아끼고 아껴서 진짜 카네이션 꽃이 담긴 화분을 사서 집으로 갔을 때 생각도 하지 못했던 꾸중을 들었다. "키울 것도 아니고 며칠 있다 버릴 이런 걸 뭐 하러 사 왔냐"라는 꾸중에 혼이 나면서도 이해를 하지는 못했지만 다음부터 꽃 같은 것은 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부모님 생신 때에도 비싸게 생일 케이크를 사도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고 싫어하시기에 어버이날이나 부모님 생신이 되면 꽃을 살 돈으로 양말세트나 속옷세트 같은 것을 사서 드리곤 했다. 꽃을 살 돈으로 다른 생필품을 사던가 차리리 맛있는 음식을 먹자는 실용주의(?) 가풍 덕에 우리 형제 학교 졸업식 때에도 꽃을 들고 찍은 사진은 없다.


내 머릿속에서 꽃다발은 비싸기만 한 쓸데없는 예비 쓰레기였으니 누구에게 꽃을 선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살벌했던 마스크와 찐따 같은 성격을 극복하고 여자친구를 사귀려면 꽃도 사고 유머도 기르고 로맨틱 해지려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걸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 모태솔로의 시간이 길어짐에 누구를 탓할 자격도 없었으리라. 그러다 20대 후반에 첫 연애를 했지만 서툴고 삐걱대기만 했던 바보였기에 금방 끝을 보고 좌절했다. 주변 지인들은 '이런 놈 어디 없는데..'라며 아쉬워했지만 내가 바보 멍청이였다는 것을 알기에 첫 연애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폐인 생활을 전전하던 중에 쏭과 불꽃이 튀어 연애를 시작을 했다. '이제부터 우리 사귀어요'라고 한 날, 함께 길을 걷다 쏭이 지나가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는 프리지어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날 퇴근 후 쏭을 만나러 가는 길에 혜화역 앞 노점에서 팔던 프리지어 몇 단을 사서 쏭에게 주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에게 혼난 이후로 처음 산 꽃다발이었다. 그 꽃을 받을 때 기뻐하던 쏭의 모습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향은 좋지만 금방 사그라드는 프리지어 말고도 오래가는 꽃을 검색해서 샀던 스타치스 다발도 좋아하는 걸 보며 '꽃다발을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쏭과 결혼 후에도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프리지어를 사 오곤 했다. 최대한 꽃이 피지 않고 꽃봉오리만 맺혀있는 것으로 골라서 하루라도 오래갈 수 있도록 사 오면 쏭은 가지 밑동을 가위로 손질해서 꽃병에 꽂아 식탁 위에 두곤 했다. 장모님도 꽃을 좋아하셔서 어버이날에 꽃을 드리면 베란다 한쪽에 예쁘게 걸어놓곤 하셨다. 세월이 지나서도 우리 부모님은 꽃다발은 쓸데없는 것이라며 그 돈으로 와서 맛있는 밥이나 먹자라고 하셔서 웃픈 어버이날이 되곤 했다. 11월에 호은이 태어나고 몇 달을 집에서만 있다가 봄이 다가와 외출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불광천을 보던 쏭을 아직 기억한다. 물론 야근에 찌들어 있다가 쉬는 날 반쯤은 끌려 나오긴 했지만 만개한 벚꽃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소녀처럼 좋아하는 쏭을 보며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 이후 매년 봄 벚꽃이 피어나는 시기가 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서 불광천 이외에도 정독도서관이나 창경궁으로 꽃놀이를 나가곤 했다. 제주로 이주해서도 마찬가지로 봄꽃을 보러 가는 나들이는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서울에서 봤던 꽃들과 차원이 다르게 제주의 봄은 유채꽃과 벚꽃의 환상적인 조화가 섬 전체에 벌어지기에 쏭은 물론 호은도 항상 돌아오는 봄의 꽃놀이를 기다리곤 한다.


어제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하나로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려나' 하는 생각으로 들어가는데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매장 입구 한 편의 꽃 코너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이런저런 화분들이 선반에 있고 제일 앞에 프리지어가 커다란 양동이에 비닐다발로 꽂혀 있었다. 그냥 눈에 노랑, 빨강 한 색들이 빨려들듯이 확 들어왔다. 쓱 가서 한 단을 들었는데 가격이 육천 원이었다. 14년 전 혜화역 노점에서 샀던 게 천오백 원이었는데, 10년 전 연신내역 앞에서 샀을 때가 삼천 원이었는데 육천 원이라니 너무 비쌌다. 저녁거리 사러 온 건데, 집에 달걀이 떨어져서 사러 온 건데, 달걀 한 판이 칠 천 원인데 이걸 육천 원 주고 사야 하나 하는 생각에 한 단을 들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뭔가 영 찝찝한 느낌이 있었지만 모른 척 넘어가고 금방 잊었다.


그리고 오늘, 뜬금없이 가족 단톡방에 프리지어 사진이 올라왔다. 14년 전 오늘 내가 프리지어를 선물했던 날이었단다. 요즘 휴대폰이 얼마나 좋은지 과거에 좋았던 날이 돌아오면 그날을 기억하라고 사진과 함께 알림을 보내준다고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고 하는데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내가 그래서 어제 그게 눈에 들어왔구나, 내가 그걸 생각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확 다가왔다. 퇴근길에 하나로마트로 달려가서 당장 프리지어 두 단을 샀다. 어제 생각했던 달걀 한 판에 얼마네 하는 생각은 다 걷어차 버리고 곱게 모셔 집으로 돌아와 쏭을 기다리며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퇴근 후 들어온 쏭이 프리지어를 보며 '아 이러라고 올린 건 아닌데'라고 말은 했지만 얼굴엔 환한 미소가 나를 안심시켰다. 예전엔 꽃병에 꽂았지만 지금은 꽃병이 없어서 전에 먹고 남겨둔 예쁜 위스키 병에 꽃을 꽃아 식탁에 두는 쏭을 보며 사 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도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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