냠냠 끄적-05. 귤
달달한 뀰, 밍밍한 뮬, 신 슐, 시원한 큘, 초록색은 안익은 거
어릴 적 겨울이 오면 우리 가족의 간식은 항상 귤이었다. 사과나 배 같은 과일보다 귤이 싸기도 했지만 온 가족이 귤을 좋아하다 보니 어머니나 아버지의 월급날 시장에서 한 박스를 사 오면 사흘이 채 되기도 전에 다 먹었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하나둘씩 까먹다 보면 방바닥에 귤껍질이 산처럼 쌓이고 손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일쑤였다. 귤을 하도 많이 먹어서 얼굴이 황달마냥 노랗게 뜨기도 해 주위 어른들이 이 집 아이들이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묻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혼자 살면서는 옛날처럼 귤을 먹지 않았다. 본가에서야 부모님이 사주시니까 먹기는 했지만 혼자 살면서 과일까지 챙겨 먹기는 사치이기에 그렇게 됐다. 그 시절 나에게는 선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주문하는 화채나 통조림 황도가 유일한 과일이었다.
쏭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지로 온 11월 말의 제주도는 귤 수확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함께 올레길을 걸으며 돌담 너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귤을 보며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났다. 제주도 여행을 왔다 돌아가면 만원에 열 박스씩 주던 싸구려 상자에 들어있는 초콜릿 선물을 한다지만 우리는 귤을 샀다. 귤을 열 박스를 넘게 사서 서로의 직장으로 배송시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서 복귀한 직장에서 귤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이 참 좋았다.
그러다가 제주로 이주를 했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서 직장도 구하고 내 집은 아니었지만 마당 있는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제주로 이주하고 첫겨울이 찾아왔을 때 여태 살면서 먹었던 귤만큼을 한 해 겨울 동안 다 먹었던 것 같다. 우스갯소리로 제주에서 귤을 사 먹으면 인간관계가 잘못된 거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았던 것 같다. 귤을 아무리 먹어도 2,3일 후면 귤이 선물로 들어왔다. 이주민 모임에서 만난 형님이 "너네 생각나서 가져왔다"하시며 마대자루 한가득을 주시고, 직장에서 귤밭을 부업으로 하시는 형님이 "제수씨랑 같이 먹어라"하시며 콘테나 가득 귤을 담아 주셨다. 겨우내 귤을 까서도 먹고 갈아서도 먹고 그래도 남아서 잼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렇게 악으로 깡으로 먹다 보니까 시간이 갈수록 귤이 질리는 게 아니라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아직도 귤철이 오면 여기저기에서 귤을 주셔서 감사히 잘 먹고 있다. 노지귤, 비가림귤, 천혜향, 레드향, 한라봉 등등 온갖 다른 품종과 이름으로 있지만 어찌 됐건 나는 어렸을 때 박스채 쌓아놓고 먹을 때처럼 귤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제주살이 9년차가 되면서 마냥 얻어먹기보다는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서 조금이나마 귤밭일을 도와드리고 있다. 몇 년을 얻어먹었으면 염치가 있어야지 라는 생각에 가지치기도 도와드리고 제초작업이나 수확시기에도 작게나마 옆에서 손을 더해 일을 한다. 부모님도 아들이 보내주는 귤이 참 맛나서 시장표 귤은 못 드시겠다고 하시니 보람도 있고 즐겁다.
새콤달콤한 귤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