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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Aug 09. 2022

시를 마시는 밤기차


장거리 기차를 탈 때면 시집을 한두권 들고 탄다. 늦은 오후 출발하여 밤에 도착하는 기차를 탈 때는 역시 시집이 제격이다. 술 한잔 마시듯 시를 한편 읽고, 지나가는 차창을 안주 삼아 멍하니 바라본다. 자음과 모음의 배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은 수많은 단어의 조합인 두툼한 책보다, 하아얀 여백 속 몇개의 문장을 음미하고 곱씹을 수 있는 시집은 밤기차에 잘 어울린다. 저녁이 스을쩍 내려앉는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한 안주거리가 된다. 문득 네** 지도를 켠다. 지금 내가 지나치는 곳의 좌표를 짚어준다. '대전 대덕구 석봉동 681-4' '석봉동'이라는 옛스러운 이름을 지닌 동네를 지나치고 있다. 이름이라도 알고 동네를 둘러보니 차창 밖 안주가 더 정겹게 다가온다.


시집을 살 때는 서점에서 직접 돈을 지불해서 산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시집을 산 적은 없다. 내 나름의 시인에 대한 예의이다. 시집의 생김새를 만져보고 들춰보고 그러다 꼭 마음에 드는 시집을 만나면 가슴에 소중히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새삼스럽게 그런 작은 수고를 하는 거다. 그런 행위는 집 앞으로 따끈하게 배달해주는 알사와 예스사가 대신해줄 수는 없는 낭만의 영역이다. 인터넷 서점으로 사든,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든, 그 이익이 시인에게 가 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냥 나만의 의식이다. '시'라는 거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데 이토록 단순한 의례라니 미안할 따름이다.


이병률시인의 시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가는 도시가 '바다를 품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정말 바다가 잘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겠다는 듯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며 시 한편씩 아껴가며 들이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바다처럼 고요해지기 위함이다. '알 수 없는 말들이나 꾸미느니 저녁 화덕에 받쳐 불을 담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여러 책들의 스토리를 제쳐두고, 은은한 생활인으로서 시인의 호주머니의 온기를 느껴보기 위함이다. '우리는 말이 없는 나라에 와 있는 사람처럼 말이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언젠가는 우리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눈빛'만으로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고요를 연습해보기 위함이다.


시인이 지구의 서랍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나는 시인의 서랍을 뒤적인다. 세상 누구든 펼쳐볼 수 있는 서랍인데도 많은 이들이 도통 서랍을 열지 않는다. 시를 읽는 문화는 사라진지 오래다. '시를 읽는 밤' 같은 것은 밑도 끝도 없이 낭만적인데, 그건 나한테만 그런 것 같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어야 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좀 늦은 감이 있다.  우연히 시를 출판하는 출판업계 분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출판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그러는 줄 처음 알고 흥미로웠다. 그런다는 것은, 시를 읽는다는 것이다. 미공개된 시들을 읽고 또 읽으며 시집에 제목을 정말 정말 신중히 토론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밤이었다. 시를 읽는 밤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늦은 밤, 우리 같이 '시를 마셔볼까?'라고 말하면, '라면 먹고 갈래?'만큼 설레여하는 표정을 자주 마주하고 싶다.





#밤기차 #시읽는밤 #시밤 #서울에서부산까지 #이병률 #시인 #바다는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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