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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Aug 22. 2022

거짓말


영어가 짧아서 어쩔 수 없이 했던 거짓말 이야기.


유럽을 방랑하던 20대 중에서도 후반 시절. 런던에서 좀 나이 든 학생 신분으로 머무르던 시절. 2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이지젯을 끊고 프랑스와 스위스 도시 곳곳을 드나들며 자유 맛 디저트를 먹던 시절. 당시 게스트하우스란 약간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여행객들의 쉼터. 허나 그 속에서도 이야기는 피어오르는 법. 기억나는 장면 하나. 초저녁, 숙소에 도착해 당시 즐겨 읽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있었다. 근데 그게 너무 슬픈 거다. 제제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뽀르뚜까 아저씨가 죽는 장면에서 눈물이 터지는데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 2층 침대에서 몸을 콩콩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때, 하필이면 대각선 1층 침대 주인이 들어왔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금발 여학생. 그녀가 내게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나는 눈물범벅인 내 얼굴을 보여줄 수 없는 상황.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갑자기 너무 당황이 되었다. 이 나이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보고 울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때, 번개처럼 스쳐간 영어 표현은 미드를 많이 본 청소년 수준이었다. '어...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I broke up with my bf' 솔직히 당황되니 그 정도의 영어가 내 최대치였다. 'broke up with~'라는 숙어를 이런 때 써먹다니. 놀라워라!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안도감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따뜻할 일? 그녀 덕분에 나의 이별(?)은 잘 정돈되었다. 나는 대각선 아래로, 그녀는 대각선 위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려 영어로... 물론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 밤, 다행히 다른 여행객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나는 내 거짓말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고 울었다고. 그녀가 탱탱볼 튀듯이 몸을 흔들어가며 웃었다. hey, sweeties(어이, 달콤아) 라고 나를 부르더니, 정말 따스한 눈빛으로(심지어 청록색이 도는 파란색 눈이었다) 너는 자라면 분명 마음이 따뜻한 어른이 될 거라고 말했다. 따뜻한 건 좋은데, '어른이 될 거'라고 했니??? 이 친구는 나를 몇 살로 생각하는 것인가. 내 나이를 알려줄까 하다가 '신분증' 같은 것으로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하는 자유여행에서 굳이, 하는 생각에 같이 웃어주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던 그녀의 시원한 웃음소리는 여전히 기억난다. 웃음소리만으로도 한 사람이 따뜻하게 기억된다는 것. 나의 대단한 오감, 그중에서도 청각에 감사한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기차를 타야 하는 내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곤히 자고 있었다. 작은 쪽지를 남겼다. 지난밤, '혼자'가 아닌 '함께'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썼던 것 같다. 내가 이십 하고도 팔살, 28살은 되었다고 쓸까 하다가, 언젠가는 꼭 보자,라고 썼다. 다시 만나기 힘든 걸 알면서도 '우리 언젠가 꼭(surely) 보자'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참(truly) 좋다'의 다른 문장이겠다. 여행지에서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아닐까 한다. 그녀는 나를 몇 살로 생각한 걸까. 아직도 그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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