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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Jan 23. 2023

난 무서운 게 없어요


#장면 1.


여러 가족이 모인 작년 송년모임, 그중에 최연소 5살 꼬맹이는 다섯 밤만 지나면 6살이 된다고 들떠있었다. '아가'라고 칭하는 어른들에게 발끈하는 모습에 크게 웃었던 기억. '난 이제 6살이에요. 형아예요.' 와하하... 하고 웃던 우리 어르니들에게 그가 씩씩하게 던진 마지막 문장이 압권!


'난 무서운 게 없어요!!!'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좋겠다! 무서운 게 없다고?' 내가 진심 부러운 표정이었나 보다.

옆에 있던 초딩 꼬맹이가 물었다.

'이모, 어른들도 무서운 게 있어?'

'어... 그 그... 그럼 있지'

아마 너보다 훨씬 많을 걸... 무서운 걸 무섭다고 말 못 하고 괜히 딴청 피우는 게 어른이란다..


#장면 2.


시작되었다. 어르신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의 반복에 우리는 지쳐갔다. 나름 예의범절 같은 것을 장착하고 있는 나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중간에 자리를 비우거나 말을 자르거나 대놓고 건성으로 듣는 건 민족의 대명절 설날에 할 행동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망했다, 만 외치면서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시나리오 삼아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다. 이야기는 20대의 그, 무려 50~60년 전의 이야기인데.. 젊고 가난한 청년이 주인공이다. 이제까지 몇 번 들었을까. 그는 왜 저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가. 마치 절대 내려놓아선 안 되는 가방 하나를 메고 사는 듯한 모습. 그 가방을 끌러서 이야기를 펼쳐놓을 때 잠시나마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까. 그의 눈빛은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그 가난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으로 버무려져 있다. 문득, 그가 왜 반복인 줄 알면서도 지금 내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람의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떤 이유로, 어떤 의도로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가. 왜 그는 짐가방을 내려놓지 못한 채 긴 세월을 보냈는가. 그 짐을 어디에 내려놓아야 할지 몰라 이고 지고 살아온걸까. '망했다'라고 생각하며 그 앞에 앉아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 문득, 6살 꼬맹이가 떠올랐다. '난 무서운 게 없다고요!' 가장 작은 사람과 가장 오래된 사람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혹, 그는 무서웠던 것이 아닐까. 귀를 열고 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본다. 


20대의 그는 외롭고 무서웠구나... 그때 그 누구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구나. 한 사람이라도 아픔을 나눌 수 있었던 기억은 힘이 약하다. 그때 내 곁에 있어준 그가 '물'이 되어 내 삶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해 주었기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따갑고 짠내 가득했을 때, 내 짠기를 희석해 주었던 한 사람 덕분에 사람은 살아간다.. 그때, 그는 마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구나.. 외로웠구나, 무서웠구나...


'그때,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무섭기도 했겠고요.

저라면 진짜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멈칫,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린다. 스스로 내뱉을 수 없었던 말, '외로웠다는 말. 무서웠다는 말'을 누군가 대신해 주길 바랐던 걸까. 긴 시간 그의 마음 속을 떠돌며 생채기를 냈을 묵은 감정을 헤아려보니 외로움과 무서움이 오래도록 그와 손잡고 있었구나..알아진다. 열심히 살았던만큼 존중받고 싶은 그 마음이, 수십번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홀로 외롭게 건너가야 할 인생의 어떤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건너 지금 여기 내 앞에 와 있는 작은 어르신들에게, '그러셨구나...' 공감의 말로 위로할 수 있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혹, 외롭지 않나 돌아보고 안아주며 건너가는 한 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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