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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Dec 29. 2022

최초의 사랑 기억


최초의 사랑받은 기억은 타인에게 쓰다듬받은 감각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머리를 한가닥 한가닥 만져줄 때마다 '잠들어라' 주술을 부리듯 미용사언니는 주술사인 것만 같다. 내가 잠이 들면 내 머리를 다 뽑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상상을 하면서도 나는 자꾸만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깨고 내가 왜 자꾸 잠드는지, 미용사언니만 비밀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 물었다. 미용사들끼리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 본인이 가장 마음이 가는 설이라며 말해준다. 어린 시절, 우리가 기억도 못하는 작은 사람이었을 때, 사람이라고 하기도 무엇할 정도로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는 '작은'이었을 때, 우리를 따스하게 재우던 손길, 그들은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울다가도 까무룩 잠이 들던 기억,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 여기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한 손길.


선명한 기억이 없다 해도 내 몸의 감각은 최초의 사랑받은 감각을 기억하는 걸까.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순간, 그 세포가 오랜 방황을 멈추고 안도하는 것일까. 그렇게 오래 기다린 사랑이 만나지는 것일까. 미용사언니는 그 옛날 우리의 기억을 깨우는 마법사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 내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는 건지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일. 너는 사랑받는 존재였어, 기억을 떠오르게 해 주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야 완성되는 사랑.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를 만져주는 행위는, 가장 사랑을 닮았다 하겠다. 화려하게 꾸며진 가면을 벗무방비상태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가만 앉는다. 내 머리를 너에게 맡긴다는 것은, 너의 사랑을 받겠다는 다짐. 머리칼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네 머리를 말려줄 때, 너는 마음에 없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아 뜨거워.. 아 거기 거기 좀 더 말려줘! 그의 투정이 모두 '사랑받아서 너무 좋아'로 들릴 때, 당신 역시 충분히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안심하고 머리를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생각해 본다. 한 해를 건너오면서 나는 얼마나 내 주위 사람들을 쓰다듬어주었는가 떠올려본다. 의심 없이 내 앞에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를 내맡길 사람 몇이나 있나 생각해 본다. 자꾸만 마음이 가는, 쓰다듬어주고 싶은 마음을 떠올려본다.


한 해가 가기 전, 내가 할 일은 누군가를 쓰다듬는 일. 잊지 말아야 한다. 최초의 사랑 기억은 타인에게 쓰다듬받은 감각. 그 감각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감각을 새해가 되면 더 소중하게 가꾸는 일.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해야겠다. 그것으로 충분할 2023년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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