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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Apr 06. 2023

말 분위기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에 대해 길게 얘기 때가 제법 있다.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부를 맴도는 것이다. 관계에서도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숨겨두고, 겉도는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은연중에 너는 내 비밀을 알아챌 수 있니, 너는 지금의 나를 느낄 수 있니,라고 묻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진로 상담할 때의 일이다. 매주 상담을 오는 여학생이 있었다. 연락 없이 안 오는 경우가 없었는데 한 주 오지 않았다. 다음 주 상담에 골똘한 모습으로 나타난 A양. 지난주 무슨 일이 있었냐는 물음에  '죄송해요. 집에 일이 있었어요.."하고 말을 흐렸다. 더 깊은 질문을 하기는 무리가 있어서 이전 상담에 이어 상담을 진행했다. 상담을 하는 중, 이상하게 그 친구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인데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눈은 '살려달라'는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도와주세요'라는 눈소리가 들려왔다. 눈으로도 말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상담을 30분 만에 마치고, 잠깐 건물 앞에 소공원 한 바퀴 돌까? 하고 데리고 나왔다. 내 느낌이 맞을까.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그때 문득 떠오른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힘들어 보이는데 혼자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어른들이 도와줄 수 있어." 멈칫하고 아무 말이 없던 A양은...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그랬어요.. 저만 힘든 것도 아니고요."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궁금해하는 내 마음은 전혀 도움 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고 잘 눌러놓고.. "친구들도 좋지. 그런데 진짜 힘들 때는 전문가에게 도움받는 게 좋아. 도움받을 수 있어." 그리고 손을 잡아 주었다. 한두 바퀴 더 돌면서.. 친구에게 2층 상담센터에 위기대처상담을 받도록 안내했다. 내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혼자 가라고 하면 안 갈 거 같아서 손을 잡고 2층 상담실에 데려갔다. 선생님과 눈짓으로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이후에 전해 듣기로는 집안의 상황은 심각했고, 재판까지 넘어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상담 선생님의 말로는 혼자서 견디고 견디다가 더 악화되어 힘들어진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일을 계기로, 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상대의 말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느껴야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그 친구를 통해 배웠다. 최근에는 첫 상담에서 '요즘 뭘 하면 행복해요?'라고 묻는 첫 질문에 눈물을 쏟아내는 친구를 보면서 참 고맙고 고마웠다. 첫 상담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친구의 눈물은 그냥 눈물이 아니고 그녀가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이었다. '눈물'이라는 그녀의 말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고 안전한 사이가 되었다. 이제 긴장 내려놓고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며 그녀의 마음속을 함께 거닐면 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인 것이다.


그 사람의 말 분위기, 그것은 목소리의 떨림일 수 있고 눈물일 수 있고 눈빛일 수 있고 침묵일 수 있다. 괜찮다고 척하는 말에 속지 말자.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말 분위기에서 느껴보았으면 한다.  


당신과는 서로의 말 분위기를 투명하게 느낄 수 있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복잡하게 위장하고 사는 가난한 내 마음이, 무거운 어깨 짐 내려놓고 맨 얼굴로 당신 앞에 철퍼덕 앉았으면 한다. 그러면 당신은 난생처음 세상을 만난 어린 봄나무처럼, 든든하고 한결같은 겨울 할아버지 나무처럼 사시사철 내 곁에 있어주겠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철없는 소녀처럼 한 시절 가장 행복한 목소리를 당신에게만 들리도록 소곤소곤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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