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는 자신의 저서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대학총장이라면 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필수과목(눈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만들겠다고'. 눈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산에서 무엇을 보았냐고 물어보면 대체로 이렇게 답한다고 합니다. '별 거 없었어.(Nothing in particular)'. 바람이 쓰다듬어주는 감촉,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 나뭇잎의 앞뒤면의 촉감, 지저귀는 풀벌레와 새들, 낮은 목소리로 흐르는 계곡물소리, 짙은 초록색의 숲 향기...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온갖 것을 보는데 정작 우리는 별 거 없이 살아가지요. 가지지 않았을 때 비로소 가장 크게 가질 수 있는 자의 풍요. 세상을 손으로 보고 손으로 들은 그녀의 '눈 사용법'은 어떤 과목이었을까요?
깊어가는 여름밤, 공원을 거닐며 이런 사유를 해 보았습니다.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나는,
이 여름을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가.
가장 안쓰러운 사람은 오감을 가지고도 눈 감고 귀 막고
내 생각에 빠져 살아가는 '나'가 아닐까...
나는 이 생에
생각하러 왔는가, 경험하고 감각하러 왔는가.
나는 후회하고 미리 걱정하기를 원하는가,
지금 여기 내 앞에 펼쳐진 여름을,
내 앞에 사람을 느끼기를 원하는가.
매미소리 가득한 긴 낮, 하늘 가득 구름 구름 흰 구름, 어쩐지 들뜨는 여름 음악, '덥다'라고 말할 때마다 벌금 내기 하자며 웃는 친구, 꽤 많이 모인 기분 좋은 천 원 다발, 그 돈을 모아 낮에 마시는 에일 맥주, 뜨거운 태양 아래 강제 선탠 당한 생명력 가득한 꽃과 나무와 열매들, 풀벌레 소리, 여름밤의 끈적임을 느끼며 거니는 저녁 산책, 여름이 배경인 장편 소설, 좋은 문장에 연필 긋는 소리, 귀가 쉬어가는 고요한 여름밤, 꾸벅꾸벅 졸다가 깊은 잠.... 꿈속에서는 펑펑 눈이 내립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여기 어디지? 어 여기 삿포로야, 아 이거 꿈이지... 이거 꿈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눈 떠보니 눈범벅, 아니 땀범벅... 창을 여니 쏟아져 들어오는 매미 소리,
여름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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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락된 감각이란 감각 모두를 최대한 발휘하세요. 자연이 마련해 준 여러 수단을 통해 세상이 당신에게 선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만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