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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Jan 02. 2024

그러니까 따뜻하게


"노인이 다시 묻더라. 전평호텔은 사라졌습니까? 

고개를 들고 내가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어. 


(....)


그 새벽에 찾아와서 어디에도 없는 호텔을 찾는다면, 

정신이 좀 이상한 노인이 아닐까? 

치매라든가 그런 걸 의심하는 게 좋았을 텐데.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어.


다르게, 어떻게?


그러니까 따뜻하게

자세히 보니까 노인이 떨고 있더라고. 그래서 커피숍으로 데려가 뜨거운 물을 내주었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노인이 고맙다고 하더군. 뜨거운 물도 그렇지만, 전평호텔이 사라진 건 아닐 것이라고 얘기한 걸 말하는 거였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는 거야." 



- 김연수,  <보일러> 중에서...



전평호텔은 사십이 년 전 노인이 지금은 몸을  떠난 아내와 신혼여행 때 묵은 호텔이었다. 지금은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은 곳. 인터넷으로도 검색되지 않는 곳.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존재하는 곳. 누군가 한 명쯤은 '전평호텔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라고 말해주길 바랐던 곳. 


"노인은 다시 이야기를 했어. 청둥오리를 보는 일도, 아내와 밥을 먹는 일도, 또 둘이서 잠드는 일도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됐다고."


한 해를 시작하며 한참 겨울인 새해 두 번째 날, 김연수의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펼쳤다. <보일러>라는 작은 단편 속에 올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정표가 심겨 있었다. 해마다 문장 하나를 정해 그 문장에 기대어 한 해를 살아간다. 연초에 행하는 오랜 의식 중 하나다. 작년의 문장에는 '기쁨'이 담겨있어서인지 기쁜 일들을 많이 만났다. 마음이 축나고 서성이던 일도 더러 있었고, 어떤 부분은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고전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잘 건너왔다. 어떤 일을 만나든 '기쁨의 안경'을 더듬어 썼던 덕분이다. 


2024년은, '그러니까 따뜻하게'라는 문장을 선정해 본다. 가까운 이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내향적인 면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잘 건네지 못한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올해는 가까운 이에게는 다정하게, 모르는 이에게는 이전과는 다르게, 그러니까 따뜻하게 대하기로 마음 정해 본다. 그래야 따뜻함에 더 닿을 수 있을 테니. 그래야 평범하지만 소중한 기적 같은 순간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관리사무소 분께, 식사를 쟁반에 놓아주신 분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먼저 말해보았다. 그렇게 모르는 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부터 시작. 이게 뭐라고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내 작은 용기 덕분에 두 사람이 환해졌다. 내 가슴도 밝아졌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2024년 건너가 보기로.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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