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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이모 Jan 05. 2024

첫 마음 첫 공포


성공이다! 오늘 오전 수영 강습을 받았다. 처음은 아니었다. 열 살 무렵 두어 달 수영 강습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물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던 그즈음, 가족들과 함께 갔던 해수욕장에서 사람 두 명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큰 사건이었다. 엄마는 그들이 나와 언니라고 착각하고 패닉 했고, 멀리서 놀고 있던 우리를 뒤늦게 찾아내고 한참 우셨다. 물은 무서운 거구나, 내가 위험해지면 엄마는 저런 표정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가슴에 새겨졌고 물속 세상이란 무시무시한 공포로 남겨졌다. 이후 물과는 관계없이 살아왔다. 


살면서 언젠가는 수영을 배워야 하지 않겠나, 막연히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마다 마음만 먹고 시도하지 못했다. 올해는 기준치를 낮추었다. 동네 수영장에 등록하고 (수영은 신규회원 등록이 매우 치열하다) 수영 용품을 구매한 후 첫 수업까지 가면, 그것을 '성공'으로 쳐 주기로 했다. 강습비를 버려도 되고 수영복도 남 주어도 된다, 그냥 수영장에 가자. 물에 몸을 다 넣어보자. 그거면 된다. 그리고 오늘 나는 성공했다. 


수영장은 할매들의 성지였다. 나 같은 귀염둥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녀들은 매우 반겨주었고 수업 시작 전에는 다 같이 동그랗게 물속에서 손을 잡고, 오늘 하루도 힘차게 파이팅! 을 외쳤다. 나도 엉겁결에 파이팅을 외쳤다. 강사님은 젊은 여성이었는데, 어릴 때 배운 것은 몸이 기억한다며 자유형을 해 보라고 했다. 나는 키판을 붙잡고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절대 물을 안 먹으려고) 다리를 힘껏 휘둘렀으나 금세 가라앉았고, 다른 분들의 진로를 방해했고, 수영장 중간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강사님이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청소년풀장으로 쫓겨났다. 


"혹시...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나요? 초등학생 같은 나의 질문에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나는 고백했다. "저.. 물속에서 숨을 못 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완전히 처음부터 하나씩 같이 해 볼게요. 서두를 것 없어요. 수영은 4개의 영법 밖에 없어요. 아무리 잘하고 빨리 해도 4개가 끝이에요. 그러니 천천히. 숨 쉬는 것부터 시작하죠. 먼저 수영장을 걸어 다니면서 물을 느껴보세요. 팔과 다리에 물이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걸어보세요." 


햇병아리 대하듯 찬찬히 설명해 주는 강사님이 신입사원 때 하늘 같아 보이던 대리님 같았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첫 직장에서의 어떤 시간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해 내야 하는 일이 많고 책임감이 커진다. 어른으로의 삶,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여야 하는 삶.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시키는 데로 따라 하기보다 스스로 길을 찾아 해내는 삶. 그동안 내가 어른인 척하느라 고단했구나 알아졌다. 귀염둥이와 햇병아리의 감각이 생경하지만 싫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근육을 쓰며, 새로운 것을 배우며, 첫 마음으로 돌아가보았다. 


물속을 거닐며..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었어! 고요하게 물속을 거니는 감각. 저 바깥에 힘찬 레이스가 아니라 이런 곳이 나와 잘 맞지... 고요한 물소리. 다리를 스치는 출렁임의 감각. 괜찮아, 해치지 않아, 네 몸을 나에게 맡겨봐... 그렇게 물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수업 말미에는 4초간 물속 호흡을 하는 음--파도 해보았다. 어렸을 때 했던 음-파가 기억이 났다. 그래 이런 느낌이었어. 물속 바닥이 환하게 보이는 느낌. 


"잘하셨어요. 음-파 하시는 거 제가 봤는데요. 5~6초 물속에 있다가 나오시더라고요. 물에 대한 공포 내려놓으셔도 돼요. 진짜 물에 대한 공포 있으신 분들은 하얗게 질리거나 심장이 날뛴다고 하시거든요. 다음 주 월요일에는 진도 조금 더 나갈게요. 주말 잘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강사님이 처음보다 살짝 친근하게 말했다. 와... 내가 잘 해냈구나! 나도 모르게 "네, 대리님"이라고 할 뻔.


물에 대한 공포는 내 생각이었구나.. 그렇게 오랜 생각 하나를 수영장에 두고 걸어 나왔다. 오늘까지만 수영 강습을 받으면 성공인 건데... 월요일에 가고 싶어졌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생. 이러다가 수영이 재밌다고 글을 쓰는 건 아닌지. 한동안 밀쳐두었던 진도가 엔간히 안 나가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얼마나 떨리고 설렜는지, 떠올려 보니 왜이리 뭉클한가요. 혹시 이거 눈물인가요. 원래 수영장 다녀오면 눈물 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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