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앞에서 그녀의 외모를 논할 때 써서는 안 되는 단어가 있다고 하니 바로 '개성'이다.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와는 다르게도 여성에게 던지는 순간 '너를 차마 예쁘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이 단어를 써서 표현을 회피하겠다'의 준말로 사용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자아이자 존중받아야 할 부분이기도 '개성'. 이 개성은 어쩌다가 '못생기다'의 순화어로써 자리매김하게 된 것일까?
생각을 해보면 집단주의를 중요시하는 문화권을 배경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온 한국인들은 '나'보다는 '우리'에 익숙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는 별도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고 이것은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을 주면서 동시에 안정감이라는 기능까지 겸하게 된다.
이런 문화에 오랫동안 젖어있으면서 개별적인 나의 존재를 차별화하는 것보다는 무리 속에 녹아들어 있는 것에 더 편안했고 그렇게 집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혹여나 무리를 떠나 홀로 서보려 해도 남과 다른 길을 가는 나를 주시하는 눈초리가 마치 이불 밖으로 나가 맞는 한겨울의 아침 공기처럼 낯설고 차갑게 느껴진다. 그리고 굳이 그 느낌을 견뎌내기보다는 그냥 다시 포근한 무리 안으로 되돌아가는 편이 더 쉽다.
외모와 패션도 마찬가지다. 예쁘고 잘생겼지만 다들 어디선가 본 얼굴이고 트렌디한 치장을 했지만 모두가 입고 있는 그 옷과 그 헤어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예쁘고 패셔너블하고 싶지만 무리의 표준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의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 있게 생겼다'라는 표현은 '너는 그 무리에 속한 것 같지 않고 전혀 다른 무언가 같아'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건네받은 상대는 무리 깊숙이 뻗어 내린 뿌리가 흔들리며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무의식은 소속된 무리에서 자기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그 '개성'이라는 단어에 접근 불가 판정을 내린 것은 아닐까?
얼마 전 수입 오디오 매장에서 점원과 나눴던 대화도 인상 깊었다. "이 스피커 말인데요. 카탈로그에는 좀 더 다양한 색상이 있던데 여긴 기본 색상만 전시돼 있네요?"라는 질문에 "저희도 들여놓고 싶은데 팔리질 않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흰색이나 검정 같은 기본 색상만 찾아서요. 해외 본사에서도 한국 고객들은 참 재미가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까지 개성의 표출을 꺼릴 정도로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에 지나치게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만족스러운 나보다는 가족에게 만족스러운 내가 되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기도 했던 사회. 나에게 자랑스럽기보다는 타인으로부터의 부러움을 목표로 달리기도 했던 우리.
물론 그것이 성장을 주도하고 원동력이 되어주던 시기가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눈 가린 경주마처럼 내달리던 길 목 어딘가에 흘렸을 '나'라는 개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