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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추천> 유자 왕 & LA 필하모닉의 라흐마니노프

by 아포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한 연주자들의 음반은 해마다 열리는 열매들처럼 세계 곳곳에서 매년 그 수확을 알려오곤 한다. 열매들은 같은 종이라도 산지에 따라 그 맛과 풍미가 각각 다르듯이 연주자들이 연주하는 곡은 같지만 그 느낌과 감상은 매번 다르다.


게다가 이 열매는 상하는 것이 아니니 '아~ 10년 전에 먹었던 그 수박이 참 맛있었지'하며 아쉬움을 달랠 필요 없이 원한다면 언제나 곁에 두며 음미할 수도 있고 혹여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그 풍년의 순간을 지나쳤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기특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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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뒤늦게 접하게 되었던 이 앨범이 마침 그랬다. 바로 '유자 왕과 LA 필하모닉'의 <Rachmaninoff: The Piano Concertos & Paganini Rhapsod>.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년을 기념해 2023년 2월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실황을 담은 이 앨범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부터 4번 그리고 파가니니 랩소디까지 풍성한 구성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최대 히트곡인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첫 트랙이 시작되는데 '아니 이럴 수가!' 유자 왕의 도입부 타건에서부터 놀라고 말았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첫 타건 음이 이렇게 힘 있고 또렷하게 들리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볼륨이 좀 부족해서 플레이 후 도입부를 들으며 볼륨을 높이 하던 이곡에서 처음부터 이런 만족스러운 박력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힘과 테크닉으로 유명한 유자 왕의 연주와 그 매력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레코딩의 만남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레코딩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은데 밀폐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것이 아닌 큰 홀에서 울리는 어쿠스틱 악기들의 소리를 이토록 진하게 담아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든 음역대가 풍부하게 느껴지고 음악에 대한 집중도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b8a0d71204aa93b776cd475caed8f850.jpg 피아니스트 유자 왕(Yuja wang)

주연인 유자 왕의 힘과 뚜렷한 윤곽을 겸비한 연주는 물론 LA 필하모닉이 펼쳐내는 드넓으면서도 섬세한 배경의 표현 담긴 이 음반을 듣고 있자니 마치 풍부한 육즙이 흘러나오는 두툼한 최상급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문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했다.


특히 멀리서부터 육중하게 몰려오는 저음의 표현은 마치 '한스 짐머'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영화음악적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조금 과장된 듯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극적인 전개에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어 좀 더 깊게 감상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이 극적인 느낌을 주는 레코딩이 가지는 추가적인 장점은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이 클래식 앨범에서 POP을 느꼈다고나 할까.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면서 어깨를 들썩였으니 말이다. (아! 파격적으로 비발디를 연주했던 '파비오 비온디'를 들었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루브 한 피아노 연주와 극적인 오케스트라가 서로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며 무지빛으로 녹음된 이 음반 어느 한여름밤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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