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잘 찾아내는 사람들은 남들이 보기엔 참 재미없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확률이 크다. 소소한 즐거움이 가진 잔잔한 파형은 큰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파형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재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군 시절에 느꼈던 것들이 생각이 난다. 모든 것이 결여된 것처럼 느껴졌던 당시는 그저 훈련과 내무생활이 있는 반복의 매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판기 앞에서 선임들의 눈치를 보며 얻어 마시던 냉복숭아 음료가 그렇게나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냉복숭아'라고 사인펜으로 투박하게 적힌 버튼을 누르면 나오던 그 음료에는 실제 복숭아가 들어있을 리는 없고 인공 복숭아 향이 첨가된 설탕 가루에 물을 섞은 게 전부였을 것이다. 지금은 편의점만 가도 그와 비교할 수도 없는 맛있는 음료들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는 늘 그때 마신 냉복숭아의 맛이 더 강한 행복으로 남아있다.
물론 힘든 훈련과 한창나이의 배고픔이 만들어낸 뻔한 드라마가 아니겠냐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나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외에도 좀 더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바로 '절제'이다.
거센 파도의 바다에는 바위를 던져 넣어도 티가 나지 않지만 잔잔한 바다에는 작은 조약돌로도 선명한 파장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절제란 그런 것이었다. 비록 강제적이었지만 절제 그 자체인 군 생활은 크게 출렁이던 쾌감의 파형을 아주 잔잔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의자에 앉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식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잘 수 있어서 행복했다.
기존에는 감히 행복이란 이름에 가당치 않던 일상들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쾌락을 내일의 더 큰 쾌락으로 덧칠하지 않으면 금세 시시해져 버리던 바깥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절제되고 재미없는 삶이란 오히려 오감을 훨씬 맑고 섬세하게 그리고 기존에 느껴지지 않던 수많은 잔잔한 파형들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센서의 확장이라는 결론을 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더 큰 쾌락을 위해 하루하루 전력투구를 할 수도 있지만 결국 한계는 있고 치러야 할 대가도 크다. 주변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얻어낼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할 때가 있다.
가라앉은 흙탕물 속에서 고요하게 드러나는 금 조각들을 발견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