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자고, 나이가 들어도 소녀인 거야!" 지금은 시집가서 아이 엄마가 된 더 이상은 만날 수 없는 선영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책을 좋아하던 선영이는 마음에 드는 문구를 기억해두고 있다가 나를 만나면 그 문장을 주문처럼 외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음.. 생물학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지." 하는 농담으로 찬물을 끼얹어주는 걸 재밌어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금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기차 안에 앉아있다. 오랜만에 누나들을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오래전에 나에게 그 말을 하던 선영이의 모습이 차창에 비쳤다. 언제 마지막으로 탔었는지 기억도 희미한 완행열차의 느릿한 풍경이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쥐여준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이 달게 느껴질 무렵 시간은 반대로 평소보다 빠르게 흘러 어느덧 나는 떠밀리듯 종착역에 내린다. 역사 밖 11월의 살가운 햇살처럼 먼저 도착해 있던 누나들이 나를 반겨준다. 조금은 낯선 공기와 낯선 장소를 걷고 헤매면서도 서로를 묻는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약속 장소를 오해해 저만치 멀리 가버려 한참을 되돌아온 누나들도 있었다.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못 말리는 누나들이다.
이번엔 회비를 걷는다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결국 계산대 앞에서 서로 계산을 할 심산으로 결재 배틀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재 배틀을 좋아하지 않는 그냥 얌전히 얻어먹고 다음에 소정의 선물이라도 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나서지 않는다.
그렇게 함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아쉬움에 연신 사진도 찍어대는 왁자지껄의 중심에 선영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자고, 소녀인 거야." 왠지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모두를 위해 곱게 깎아온 단감을 먹어보라며 여전히 풋풋한 목소리로 말하는 소녀. 남들이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아는 게 부끄러워 책 표지에 귀여운 북 커버를 씌우는 소녀. 얼음처럼 단호해 보이지만 안에서 우러나오는 온기에 예쁘게 녹아내릴 줄도 아는 소녀. 역경 속에서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눈부신 빛을 지닌 소녀. 노트에 예쁜 글을 그리고 그 위에 형형색색을 칠하는 천상 소녀가 있었다.
이제 내가 한번 다시 말해본다.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소녀다. 그녀들이 그렇기를 바라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