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 두고 온 뉴욕치즈케이크

시 정덕재, 그림 권현칠

by 아포드

'로버트 로드리게즈'가 감독하고 '조지 클루니'가 나오는 <황혼에서 새벽까지>라는 영화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 한 적이 있다. 인질 범죄극으로 영화를 절반 이상 진행하며 과연 인질로 사로잡힌 가족들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몰입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갑자기 인질극은 집어치우고 뱀파이어 호러물로 장르를 바꿨기 때문이다.


전에 본 적 없는 이런 전개는 아주 혼란스러우면서도 신선했다. 마치 심혈을 기울여 도미노를 거의 완성단계까지 배치해 놓고 '사실 내가 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어'라며 그간 세워온 도미노를 자처해 무너뜨리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이 영화는 나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B급이라는 이름 아래 답답한 틀을 부수고 '이럴 수도 있는 거잖아?'라는 전개의 자유를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게 많은 A급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자유로움을 맛본 나는 이후로 B급 영화를 애호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해 볼 시집인 <정류장에 두고 온 뉴욕치즈케이크>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느꼈다. 보통은 시집을 펴보면 맨 위에 제목이 있고 줄 간격을 띄운 후 시의 내용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매 페이지마다 단정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이 시집은 조금 혹은 많이 달랐다.


등장인물인 K와 L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처럼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시로 이어지고 상황 설명인가 싶으면 또 이내 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 간다. 한 편의 희곡을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아마도 뮤지컬을 시집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시의 행과 열도 딱히 가지런히 맞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은 시로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자유로웠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를 하고 독백을 하고 싶으면 이내 낭송으로 이어지는 어느 배우의 즉흥 연기처럼 말이다.


어휘도 필요 이상으로 고급스러운 것들은 선택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고급스러운 표현들은 말 그대로 있어 보일 수는 있으나 자유로운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 족쇄처럼 작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회하거나 은근히 표현하기보다는 직설적이고 쉬움을 지향한다. 그 덕에 일반적인 시에서는 자칫 무드를 깰 수 있는 아디다스, 누가바, GS25, 참치마요 같은 상표 이름들을 사용하고서도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리고 이 책의 매력을 한껏 더 올려주는 요소로 삽화들을 빼놓을 수없다. 표지도 매력적이지만 담백한 듯 강렬하고 정밀한 듯 추상적인 느낌의 삽화들이 좋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주인공인 L과 K의 인상착의와 그림체가 에피소드마다 다르게 그려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일정하고 통일감이 있었더라면 좀 더 몰입감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폼을 잡지 않음으로 오히려 제약 없이 보편적이고 많은 것들을 표현한 L과 K의 사랑 이야기. 그 사이에 책갈피 대신 식당을 나오며 받은 카드 영수증을 끼워본다. 소탈한 느낌이 잘 어울린다.


날 때부터 용도가 정해진 고급지보다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갱지를 더 좋아할 것 같은 작가의 감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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