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에서

by 아포드

반갑다는 듯이 안겨오는 12월의 첫 번째 찬바람. 그를 고개 돌려 애써 외면하며 도착한 버스 터미널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가득했다. 스마트폰을 보며 간식을 우물거리는 여자, 휴가를 나온 군인들, 무거운 보따리를 챙겨든 허리 굽은 할머니, 히잡을 두른 중동 여자까지 터미널의 모습은 언제나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출발 10분 전이 되자 버스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기사가 어슬렁거리며 버스 앞문을 열고 티켓 검사를 하기 시작한다. 자로 잰 듯 단정하게 다듬어진 스포츠 컷의 머리는 마치 오늘 혹은 적어도 어제는 자른 것처럼 깔끔하다. 작고 무뚝뚝한 눈매에 제법 몸무게가 나갈 것 같은 덩치 그리고 결이 좋은 갈색 피부를 지녔다.


여기까지 보면 적당히 건장하면서 성실한 청년의 느낌이 든다. 다만 티켓을 받아 들 때마다 팔목에서 흔들리는 두툼한 금팔찌가 보이는 순간 앞서 나열한 특징들은 '건실'에서 '건달'의 느낌으로 선회한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 것처럼 건실 청년과 건달의 외모는 한 끗 차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나는 그를 수년 전부터 봐왔다. 내가 이용하는 노선을 담당하는 몇 명의 기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선호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금팔찌야 어쨌든 적어도 깔끔하게 다듬어진 매무새와 피부는 최소한의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표를 넘겨주고 버스 계단을 오른다. 한 계단, 두 계단 그리고 세 번째 계단을 오르려는데 앞사람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는 노년의 남성으로 티켓을 보고서도 자신의 자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지루하긴 하지만 그에게 조금 시간을 주기로 하고 계단에 서서 기다린다. 다행히 노년의 남성은 좌석 번호를 알아냈는지 느릿한 움직임으로 맨 앞좌석에 앉는다.


하지만 그것은 알아냈다기보다는 요행에 가까웠다. 머지않아 그 자리의 진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성은 차분한 톤으로 나란히 앉은 노년과 청년에게 티켓 확인을 요청한다. 말투에는 권장량 보다 한 스푼 정도 더 추가된 상냥함과 조심스러움이 얹혀있다. 아마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노년은 티켓을 앞뒤로 뒤집으며 우물쭈물하고 군복 차림이었던 청년은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귀찮다는 듯이 무성의한 목소리로 좌석 번호를 대답한다. 틀릴 리가 없는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말투다. 물론 청년은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까놓은 알밤 같은 인상, 반짝이는 안경, 태도 등에서 한대 쥐어박고 싶은 느낌이 잠시 들었다.


노년은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버스기사의 개입으로 원래 좌석으로 보내진다. 약간의 소동에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이목을 집중했던 승객들은 그가 노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관심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와 배려의 뉘앙스보다는 노년에 대한 포기와 단념처럼 느껴져서 조금 슬프기도 했다.


마침내 버스가 출발하고 차량의 흔들림에 따라 승객들의 머리가 군무를 추듯 일제히 흔들흔들거리기 시작한다. 오늘의 내 시트메이트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다. 출발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이 남자는 땀 냄새를 풍겨주며 첫인상을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뚱뚱한 만큼 자리도 많이 차지해서 창가 쪽에 앉은 나를 점점 압박해오고 있다. 거기에 커다란 배낭까지 안고 있어서 그 모습은 마치 게임오버 직전까지 쌓아 버리고만 테트리스처럼 일촉즉발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이내 곯아떨어지며 안 그래도 넓게 벌어져있던 고간의 통제권을 잃고 말았다. 점점 나에게 기대 오는 두꺼운 허벅지와 배낭의 무게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다리를 밀어서 제자리에 돌려놓자 움찔거리면서 깨는가 싶더니 몇 초 후에 다시 쓰러진다. 다리도 다시 돌아온다. 감정을 실어서 밀어붙여봐도 별 소용이 없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그의 고간을 백 번쯤 걷어찼을 무렵에서야 나의 의중이 닿았는지 그는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퍼뜩 잠을 깨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 그래도 좁은 건 마찬가지지만 기분이 한결 낫다.


사람들은 버스라는 협소한 공간에 갇혀서도 금세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호감인 사람, 비호감인 사람, 배려하는 사람, 피해 주는 사람, 다들 좋고 싫은 자리가 있고 잠시나마 좋은 길동무가 곁에 앉기를 바란다. 모두 제각각이고 용무는 다르지만 결국 가려는 곳 하나만은 만장일치인 사람들이 모인 곳.


어쨌든 앞으로는 창가에 앉는 것은 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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