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사람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흔히 서로가 서로에게 누를 끼치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은 장소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도서관은 하얀 도화지와도 같아서 숨소리 같은 사소한 소음에도 쉽게 오염되기 쉽다. 그래서 각별히 주의가 필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동족의 오감을 공격해 오는 자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나는 지금 막 도서관 열람실 문 앞에 도착했다. 열람실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노트북 사용이 허용된 곳으로 오히려 책을 읽는 사람보다는 공부를 하거나 온라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더 많다. 어쨌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당기세요'라고 쓰여있는 문을 밀고 말았다. 그러나 평소 이곳에서 벌어지는 행태에 비하자면 이건 실례 축에도 들지 못하리라.
노트북을 사용하기 위해 콘센트가 달려있으면서도 가급적 인구밀도가 낮은 구역을 물색한다. 마침 좋은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자리는 창가를 마주한 채 벽에 붙어있는 바 형태의 테이블로 구조상 맞은편에 사람이 앉을 일이 없어 빌런을 만날 확률이 크게 감소하는 명당 중 하나이다. 따라서 자리가 비어있다면 뺏기기 전에 민첩한 걸음으로 선점한다. 그리고 외투를 벗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 후 비로소 착석하려던 찰나였다.
"아! 진짜.."
앉기도 전에 빌런경보 코드 "아! 진짜.."를 발령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도서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빌런종 중 하나인 <지뢰형> 빌런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특징은 현장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그 흔적만으로 피해를 입히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것에 있다. 연령대는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로 미세하고 무수한 지우개 가루를 좌석 곳곳에 배치 후 관찰력이 부족한 이용객들을 그 희생양으로 삼는다.
일단 지뢰에 당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소지품과 몸 곳곳에 지우개 가루가 묻게 되고 가루가 묻은 물건을 모르고 가방에 넣었다면 이후에 가방 안에서 정체불명의 끈적한 가루들이 계속해서 발견되는 지속피해를 입게 된다.
자리를 쓸어내고 앉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의자에까지 가루가 범람할 정도로 양이 많아서 다른 곳에 앉기로 한다. 이번엔 여러 사람이 마주 보고 앉는 직사각형 구조의 대형 테이블이다. 일반적으로 '대(對) 빌런'이라는 관점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그래도 맨 끝 자리가 비어있다면 2 지망으로 선택할만하다.
마침내 착석을 하고 노트북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 순간 "아후...!!"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한숨이 들려왔다. 한숨의 발생지는 바로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60대 전후의 여성이었으며 그녀는 기침 및 재채기로 대표되는 <기관지형> 빌런의 파생인 <호흡기형> 빌런이라 할 수 있겠다.
무언가의 자격증 관련 서적을 펴놓고 노트에 필기를 열심히 해가며 공부 중인 그녀는 공부가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몇 분에 한 번씩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자책과 탄식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그 모습은 마치 "아!! 나이 때문에 머리는 안 돌아가는데 공부는 해야겠고 대체 이 많은 걸 언제 다 외우나!!"라며 온몸을 다해 격렬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서 말했듯이 도서관은 숨소리가 큰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하물며 한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글 쓰다 막혀 답답할 때의 내 모습이 옅게 투영되어 한편으로는 일부 공감이 느껴진다.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렇게 공기 100%로 이루어진 그녀의 절규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오히려 그보다는 몇 자리 건너 앉아있는 <전세형> 빌런의 존재가 더 거슬린다. 그는 이 열람실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은 출석률을 자랑한다. 적어도 내가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 그가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매번 면도도 안 한 꾀죄죄한 얼굴과 후줄근한 옷차림에 커다란 배낭을 들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배낭 안에서 공부거리 이외에도 커다란 물병, 머그 컵, 도시락, 과일 등등의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을 책상 위에 넓게 늘어놓고 방치한다.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물건들을 보고 곁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기에 사실상 6인석 테이블을 늘 독차지하고 있다.
그냥 텀블러나 생수통을 가지고 다니면 될 것을 꼭 별도의 큰 물통과 도자기로 된 무거운 머그잔을 지참한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턱턱 거리며 책상에 도자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한잔을 다 비운 후에는 다시 물을 따르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고요한 공간을 울린다. 그 외에도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책을 읽거나 여러 가지 형광펜의 돌려쓰면서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려주는 종합 빌런이다. 내가 보기에 저건 민원감이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도서관이란 고요함 때문에 시끄러움이 두드러지는 참 모순된 공간이다. 그래서 일정한 소음으로 잡음을 덮어버리는 카페가 오히려 선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집중을 못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검은색 크로스백을 내려놓는 누군가가 있다. 어딘지 낯익은 가방이라는 생각과 불길한 예감에 낮고 비스듬한 시선으로 옆을 본다. 그곳에는 회색 발가락 양말에 샌들을 신은 남자의 발이 있었다.
"아.. 진짜.."
그렇다. 그는 출몰하는 빈도수는 <전세형> 빌런에 비해 현저히 낮지만 열람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빌런 중 하나인 <주술사형> 빌런이다. 벗겨진 정수리와 하얗게 센 옆머리와 뒷머리 그리고 낡아 보이는 안경을 착용한 그는 70대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격렬한 중얼거림이다. 책을 읽는 것이겠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대악마를 상대로 사활을 건 신부의 마지막 엑소시즘과도 같다. 데시벨 자체는 높지 않지만 특유의 그 쩝쩝대는 소리와 함께 고막 깊숙이 파고드는 읊조림은 그야말로 끔찍한 산만함을 야기해 도저히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게 일정시간이 지나면 다음 루틴이 이어진다. 바로 열람실 한쪽에 있는 빈 공간 사이를 계속 왕복하며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까 읽었던 내용을 다시 격렬하게 읊조린다. 샌들 위에 올라탄 하나하나 포장된 발가락들이 부단히 움직이며 눈을 어지럽힌다. 마치 샤머니즘에서 전해져 내려온 의식을 보는 것 같은 이 광경은 상당히 주술적이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노인 공경이라는 투명한 보호막 탓에 접근해 제압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오늘도 결국 여러 빌런의 행적을 목도했고 그 밖에도 아직 다루지 못한 크고 작은 도서관 빌런들이 존재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고 이만 짐을 싸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 정체 모를 끔찍한 주술이 완성되어 내게 날아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