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그대가 보여. 이제 나의 손을 잡아 보아요. 우리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죠. "
유년기에 나에게 들려온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에는 다른 노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특별함이 있었다. 당시 TV나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오면 숨죽여서 가사를 음미하곤 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사에는 큰 관심이 없는 내게 그 노랫말은 왜 그렇게나 다가왔을까?
입을 모아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만을 노래하던 가요들 사이에서 등장한 이 노래는 환상적인 동요와도 같았다. 노래가 들려오면 마음속에는 웅장한 마법의 성이 지어지고 늪을 건너는 고난과 어둠을 헤매는 두려움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동굴 속 그대를 구해내고 날아오르는 순간이 벅찼다.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됐다.
어째서 그런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졌는지 설명할 길이 없었던 유년기의 나를 이제 와서 대변해 보자면 이렇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실만을 말하는 듯한 솔직함이 있었다. 비브라토가 없어야 제맛인 그의 노래는 휘거나 구부러짐 없이 나를 향해 올곧이 다가왔다가 요령 없이 툭 사라졌다. 아무런 재단도 염색도 가하지 않은 린넨 조각처럼 순수했다. 진심은 통한다는 말처럼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표정이 없다. 우리가 표정 없는 고양이의 얼굴을 보고도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행복하게 해석하는 것처럼 그의 노래도 듣는 사람에 몫에 달렸다는 듯이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더 큰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노래를 잘 부르는가 못 부르는가의 판단은 별 의미가 없었다. 마음에 닿았는가 닿지 않았는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주저 없이 자신의 약점을 모두 내비치는 것만 같은 솔직한 목소리로 <처음 느낌 그대로>, <여우야>, <편지>, <진심> 같은 노래들을 불러내고는 금융가로 사라졌다.
그랬던 그가 60대가 되어 돌아왔다. (그전에도 가뭄에 콩 나듯 활동을 하긴 했지만) 유튜브에 오른 공연 소식들을 보고 궁금하긴 했지만 기대되지는 않았다. 사실 40-50대 정도만 되어도 이미 전성기 원곡의 느낌을 재현해 내는 가수들은 드물기 때문이다. 하물며 60대라니.
그런데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비현실감에 휩싸였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진실됐고 오히려 깊고 넓어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생전 없던 비브라토도 딱 한 방울 넣는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만이라서 더 좋다. 아무래도 그는 추억 팔이 같은 것을 하러 무대를 찾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겐 하고 싶은 무언가가 아직 있다.
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