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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포드 Sep 23. 2024

욕망의 궤적을 따라서

한 방울의 쾌락을 위해 한잔 만큼의 불행을 감수하게 될지도




내가 욕망의 궤적을 어렴풋이 나마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아마 유년기에 너무나 가지고 싶어서 부모님을 졸라 결국 손에 넣었던 RC카를 가지고 놀면서였던 것 같다.


검은색 쿠페의 디자인을 하고 있던 RC카는 당시 나에겐 선망의 대상이었고 사러 가기 전날에는 잠도 잘 이루지 못할 정도로 설레었으며 사 온 당일도 RC카를 가지고 놀 생각에 들떠서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그것만 가지면 영원히 행복할 줄만 알았던 그 설익은 어린 마음의 풋내가 아직도 종종 떠오르곤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어린 마음은 함정에 빠지고 마는데 이유는 그 장난감이 그토록 빠르게 질릴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아니 질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때의 나는 그토록 원했던 것을 가졌는데 왜 즐거움이 계속해서 느껴지지 않는지에 대한 난감함과 기대했던 평생의 행복을 일주일 만에 잃어버린 당혹감에 마음 둘 곳을 잃고 말았다.






어린 마음은 생각한다.  


부모님을 그렇게나 졸라서 산 장난감을 일주일 만에 가지고 노는 것을 그만둔다면 부모님은 더 이상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지 않을 거라고...


그 생각을 하게 된 이후 그 RC카는 나에게 있어 즐거움의 대상에서 의무의 대상으로 형태를 바꾸게 된다.


지겹고 재미가 없어도 며칠에 한번은 RC카를 켜고 가지고 노는 시늉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또 새로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를 명분이 서니 말이다.


물론 그것도 그리 오래 해내진 못했고 어느 날부터인가는 서랍 속에서 영영 잠들게 되었다.


그 이후에 샀던 변신로봇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는 더 이상 장난감에 딱히 마음을 주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에 살 장난감도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어 찰나의 즐거움을 지나 책임과 의무라는 형태로 변화하고 마지막에는 짐이라는 형태로 굳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내가 생애 최초로 목격한 욕망의 궤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욕망의 궤적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욕망은 물질, 관계, 명예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비싸고 멋진 옷을 입고 싶기도 하고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별하고 독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재미있게도 당시 추구했던 욕망들은 어린 날의 장난감이 그랬던 것처럼  옅은 반짝임을 한번 보이곤 결국 똑같이 짐이라는 형태로 남았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부터 욕심이 생기면 행동으로 옮기던 옮기지 않던 그것이 마음속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 관찰하는 것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잿더미만 남긴 채 사라지기도 하고  홍수를 일으켰다가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증발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음에 속에서 나마 큰불과 홍수를 겪는 일은 꽤나 큰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데 나는 왜 이것을 피하지 못하고 반복하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인간이 매번 비슷한 욕심에 휘둘리고 후회를 반복되는 것은 욕망이 시작돼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굳어지는지의 궤적을 잘 새겨두지 않아서일까라는 나름의 생각을 갖게 된다.




어른이 되고 현명해진다는 것은 욕망이무엇으로
변해가지 어디로 가는지 그 궤적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내가 RC카를 가지고 있었던 기간에 비례해 그것이 어떤 존재로 자리했는지 비율로 나눠 본다면 즐거움 10%, 책임과 의무 30%, 짐 60%으로 환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즐거움을 위해 행동했지만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짐이라는 형태로서의 역할이 가장 컸듯이 누군가의 욕망 또한 원치 않았던 형태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감히 욕망을 버리고 열반에 오르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떠한 욕망이 생겨서 실행하게 된다면  그 욕망이 그리는 양상이 좋은 궤적을 그리는지 나쁜 궤적을 그리는지 유추 가능한 만큼의 자료가 쌓이도록 평소 스스로의 내면에 대한 최소한의 관찰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야 꼭 필요한 것은 주저 없이 추진하고 짐이 될 것들은 조기에 중단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모든 욕망의 시작은 달콤하긴 하다. 하지만 그 달콤함의 와중에도 한 방울의 쾌락을 위해 한잔 만큼의 불행을 감수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물론 현재도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과 욕망에 휘둘리기 십상인 일상이다.

수도사라도 되지 않는 이상 하루 종일 마음을 점검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미숙하나 욕망의 예측점에 대한 적중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저 좀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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