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와 옅은 안개가 만나 스산함을 자아내는 독일 쾰른의 1월 풍경 속 우산을 쓴 한 소녀가 있다.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앳된 얼굴의 소녀는 지금 격양된 표정으로 쾰른의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에 서있다. 그리고 움푹 파인 바닥에 빗물이 고여 이룬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부하듯 속삭인다.
"오늘 공연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소녀는 결의를 다지는 듯싶더니 이내 오페라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공연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아 아직은 고요한 오페라하우스 복도에 소녀의 긴장 어린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친다.
복도의 맨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페라하우스 무대로 이어지는 좁다란 통로가 눈에 띈다. 통로를 지나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오늘 공연을 할 연주자와 연주를 녹음할 프로듀서가 둘이서 무대 위를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먼저 와 계셨군요! 제가 바로 전화로 연락드렸던 이번 공연의 기획자 베라 브란데스입니다."
소녀가 밝은 인사로 홀에 흐르던 고요함을 깨뜨리자 미리 도착해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소녀를 향한다. 그리고 둘 중 부풀린 아프로 헤어스타일의 호리호리한 사내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조금 먼저 와서 무대 점검을 해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키스 자렛 그리고 이 친구는 오늘 공연의 녹음을 담당해 줄 만프레드 아이허라고 해요."
"그런데 오늘 연주할 피아노가 보이지 않는군요. 제가 말씀드린 피아노는 준비되었겠죠?"
" 그럼요! 무대 뒤편에 있는 창고에서 꺼내오기만 하면 된답니다!"
잠시 후 오페라하우스 직원들이 끙끙대며 피아노 한대를 무대 위로 올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무대에 오른 피아노는 예상과 달리 눈부신 검은빛은 온데간데없고 뿌옇게 쌓인 먼지가 그리고 곳곳에는 낡은 기색이 역력했다. 연주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멍하니 서있다가 곧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걸 공연에 쓴다고요? 게다 제가 말한 피아노는 뵈젠도르퍼의 290 임페리얼 그랜드 피아노였을 텐데요?"
"이건 뵈젠도르퍼는 맞지만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고요. 전혀 달라요."
"아... 그게..."
아직은 소녀티도 벗지 못한 미숙하기 짝이 없는 공연기획자와 피아노 하나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오페라하우스가 합작한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소녀는 급하게 오페라하우스 관련 부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피아노는 그게 전부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구해볼게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의 두 남자를 뒤로 한 채 어린 공연기획자는 다시 빗속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조한 표정으로 텅 빈 객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연주자 앞에 소녀는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연주자는 황급히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
" 290 임페리얼은!?"
"구하지 못했어요..."
소녀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 위로부터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무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씨를 불구하고 290 임페리얼 같은 고가의 피아노를 선뜻 건네줄 수 있는 곳은 역시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그냥 이 피아노로 연주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부탁드려요."
연주자는 몇 초간 소녀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무대에 올라 먼지 낀 피아노 앞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몇 마디를 간단하게 연주하고는 일어나 손으로 턱을 괸 채 피아노 주변을 두 바퀴쯤 천천히 걷더니 이내 객석에 앉아 있던 그의 프로듀서와 눈을 맞춘다. 프로듀서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주자가 입을 열었다.
"저음부와 고음부 건반들이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요. 몇 개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것도 있고,
페달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건... 할 수가 없어요. 난 못해요."
짧은 말을 남긴 연주자는 프로듀서와 함께 짐을 챙겨 타고 왔던 자그마한 르노 자동차에 다시 몸을 싣는다.
뒤 따라 달려 나온 소녀가 닫힌 차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곧 1400명의 관중들이 올 거예요! 어떻게 안될까요?"
"이대로 가버린다면 오늘이 제 공연 기획자로서의 마지막날이 될 거라고요!"
하지만 조수석에 앉은 연주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냥... 저를 좀 구해주세요. 제발요..."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차는 무정하게 떠나갔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와 안개에 휩싸인 오페라하우스 광장에서 소녀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책임 앞에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서있다가 체념한 듯 오페라하우스의 정문을 향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세발자국 정도 걸었을까?
"부우웅"
차 소리에 소녀는 다시 뒤를 돌아봤고 떠나갔던 르노 자동차가 돌아와 그녀의 뒤에 멈춰 선다. 그리고 조수석 창문이 반쯤 내려가더니 연주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만입니다."
"피아노의 상태를 똑똑히 봤잖나!?"
"자네의 커리어는 지금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중이라고!"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시기라고 생각하지 않나?"
프로듀서는 오페라하우스로 걸어가는 연주자의 뒤를 따르며 그를 만류했다.
"이건 악보도 리허설도 없는 즉흥 연주회야!"
"자네의 영감이 어디로 튈지 자네도 모르고 있지 않나? 그걸 다 받아내려면 모든 건반이 온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없이 오페라하우스로 향하던 연주자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건반의 제약이 오히려 나의 영감을 자유롭게 할지도."
결국 이 낡은 뵈젠도르퍼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는 공연 직전이 돼서야 급하게 조율과 점검을 마쳤지만 모든 건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텅 비었던 객석들은 이제 관객들로 가득 찼고 그들은 결코 몰랐을 우여곡절 끝에 공연은 시작을 맞이한다.
연주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대로 걸어 나와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망가진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잔잔하게 첫 소절을 시작한다.
"딴~ 단단단♩"
첫 소절을 들은 관객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객석 군데군데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연주자가 두드린 그 첫 소절은 바로 쾰른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 시작을 알리기 위해 객석에 내보내는 시그널의 멜로디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예기치 못한 친숙한 멜로디의 등장에 의아해하던 관객들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연주자는 알림 시그널로 장난스럽게 시작된 멜로디 뒤에 자신의 진심 어린 이야기를 이어 붙여나가기 시작한다.
시작과 동시에 그의 위트에 사로잡힌 관객들은 이미 감각을 곤두세우고 몰입에 빠져버린 상태다.
오늘의 이 공연... 왠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
Fin.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1975년에 쾰른 오페라하우스에서 있었던 키스 자렛의 공연 비화를 각색해 보았다.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금은 친숙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만 적어볼까 했는데 분량 조절에 실패한 듯하다.
아무튼 위에 쓴 것처럼 피아노는 망가져 있었고 사이즈도 작은 피아노였던 탓에 멀리 있는 관객들에게까지 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굉장히 강하게 타건하는 연주가 특징이다. 저음과 고음부에 문제가 있다는 제약으로 인해 중음역대가 굉장히 도드라지며 오히려 이로 인해 전에 없는 전설적인 즉흥 연주가 탄생하게 된다.
총 4곡으로 구성된 이 날의 즉흥 연주는 비록 클래식은 아니지만 마치 피아노 소나타를 연상케 하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첫 곡의 시작 부분을 자세히 들어보면 관객의 웃음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쾰른 콘서트 실황 앨범은 장르를 불문하고 피아노 솔로 앨범 중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략 400만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