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던 하늘이 충분히 짙어질 무렵 나는 오늘도 마트로 향한다. 시원하게 뻗은 큰길을 따라 걸으며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굳어갈 때쯤 이런 날씨와의 정면승부를 굳이 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에 바람을 피해 좁은 골목을 통한 지름길로 경로를 바꾼다.
좁은 지름길은 나를 한결 따뜻하고 빠르게 마트로 인도하지만 위험천만한 존재들 또한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골목을 반쯤이나 지났을 때 아니나 다를까 끽연가들이 빨간 불씨를 동반한 자욱한 연기를 흩날리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카앍~!!"
그들이 '카앍'하고 기를 모았다면 이제 '퉤'를 시전 하기 전에 신중하게 나의 행보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조하고 거센 겨울바람을 타고 그 타액이 나를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기와 재에 이미 충분한 불쾌감을 느꼈으므로 더 이상의 피해는 불허한다.
설사 끽연 중이 아니라도 골목에 서성이고 있는 상대가 아저씨라면 역시 충분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기를 모을지 모르는 미지의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방심하고 거리유지에 유념하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수 있고 그들에게 사과를 받을 확률 또한 극히 낮다.
이리저리 몸놀림을 유연하게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그들과 가능한 최대 거리를 유지하며 무사히 골목을 지날 때쯤 낯선 팔 하나가 행인들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종이 한 장을 건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팔락~!"
보나 마나 신규 필라테스 회원에게는 첫 달 할인과 요가복을 증정하는 매력적인 이벤트가 적혀있겠지만 아직 나는 그럴 준비가 안 됐다. 특히 추운 겨울이면 나는 이 종이가 참 곤란하다. 안 받자니 추운 거리에서 이걸 나눠주고 있는 사람들이 딱하고 받으면 쓰레기통을 만나기 전까지 내 손이 시리다.
하지만 그 종이를 건네고 다시 종이를 장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초..
내 앞사람이 종이를 받는 찰나에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올려 종이가 다시 장전되기 전에 해당 영역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하자 마트가 슬슬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는지 이번엔 첫째 마디에 조그만 스티커를 붙인 검지가 내 앞을 다시 가로막는다.
"스티커 하나만 붙여주시겠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스티커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스티커 하나만 붙이면 된다고 말한 주제에 스티커를 붙이고 나면 어느 흑인 아이의 사진을 펼쳐 보이며.
"이 아이가 혹시 통통해 보이시나요? 사실은 살이 찐 게 아니고 질병으로 인해 부은 것이랍니다."
라는 말 뒤에 연신 신파극을 펼친 뒤 결국 서류를 꺼내 기부할 출금 계좌와 액수를 적게 하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일회성이 아닌 매달 정해진 금액을 자동이체 해가는 방식으로 나중에 해지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더니 상담원의 엄청난 말발에 밀려 결국 해지하지 못했다는 실패담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어쨌든 기부를 해서 그 과정이 투명하게 보인다면 혹시 모르겠으나 대체 그 돈이 어떻게 모여서 어디로 이동하는지도 알 수 없고 기부자들을 많이 유치할수록 성과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오니 기부한 금액이 그들의 월급 통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언짢을 때도 있다.
역시 기부를 하고 싶다면 원하는 곳에 연락을 취해 직접 하도록 하자.
친근한 척 검지에 붙은 코딱지라도 묻히려는 듯 다가오는 그들은 무시하고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원래는 신호등이 없던 곳인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도로법상 구색 맞추기로 신호등이 설치된 것 같다. 최근 주변에 생긴 변화 중에 가장 쓸데없고 소모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나란히 서있던 한 젊은 여성이 고개를 내 앞으로 빼꼼히 내밀며 환한 미소와 함께 따뜻한 한마디를 건넨다.
"맑은 기운이 느껴지시네요."
늘 이 주변에 상주하며 혹시나 내가 복을 찾지 못하고 지나칠까 노심초사하는 행운의 요정이 오늘도 나를 찾아주었다. 나는 아직 용기가 없어 행해보지 못했지만 복을 찾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복이 있는 곳까지 손수 안내해주기도 한다니 실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일명 도믿걸이라는 코드 네임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들은 그 외모 또한 시대와 함께 변화해 왔는데 1세대의 그녀들은 마치 산에서 공부만 하다 내려온 듯한 남루한 차림에 세상물정 모를 것 같은 촌스럽고 너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화를 거듭해 낸 그녀들은 이제 다듬어진 세련된 외모와 자연스러운 말투로 뭇남성들의 가던 길을 쉽게 멈춰낼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 냈다.
"감사합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어쨌든 아쉽게도 그 순간 녹색 신호등이 켜지고 나 또한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건네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늘도 빌런들은 도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