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중에는 후숙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에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전혀 다른 풍미를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바나나처럼 기존의 맛과 향기가 짙어지는 쪽으로 후숙 되는 과일이 있는가 하면 감처럼 전혀 다른 형질을 띄며 식감 자체가 다른 홍시로 변모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후숙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은 비단 음식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의 음악이 태어난 이래 오랜 시간 산소와 맞닿고 미생물의 활발한 활동에 의해 익어가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다.
오늘은 그런 곡 중에 하나인 Joni Mitchell의 Both Sides Now를 소개해 볼까 한다.
길게 늘어트린 생머리에 드레스 차림으로 친숙한 이 캐나다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무대는 청조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청순한 드레스 차림에 커다란 드레드넛 기타를 메도 멋져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1969년에 불렀던 Both Sides Now는 저 모습처럼 군더더기 없고 담백한 목소리로 공상을 노래한다. 투박한 기타 리듬에 기대어 부르는 이 노래는 높은 곳에서 세상 곳곳에 있는 허무함을 발견하고만 어느 새의 한탄스러운 지저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시절의 조니 미첼은 마치 톡 쏘고 느낌과 함께 옅은 잔향을 남기고 이내 사리지는 시트러스의 향내 같기도 하다.
30여 년이 지난 후 이 곡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만하면 정말 감이 홍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분명 같은 멜로디와 같은 가사를 노래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있다.
수십 년의 후숙은 거친 이 노래의 정보량은 더욱 방대해져서 이제 더 이상 3분이라는 그릇에 담기엔 모자라 길이도 배로 늘어난다.
세상에 대한 한탄을 하던 새는 흔들리지 않는 깊은 무게 중심과 더 이상 가로막히지 않는 사고의 유연함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화합해 내고 흘려보낼 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어 보인다.
2024년 현재도 여전히 그녀는 같은 멜로디와 가사를 노래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다시 달라졌다.
그녀는 이제 아득히 오래전 자신이 계곡과 구름 사이로 떠났던 모험 끝에 발견한 어느 아이스크림 성에서 만나고 간직해 오던 비밀들을 후세에 전한다.
모든 것은 추억이 되고 저 멀리 흘러간 이야기들이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만족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