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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에스프레소맨 2화(완결)

by 아포드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그녀는 몹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매니저에게 말을 건네왔다.


"아니 여기서 일하는 분 중에 그 안경 쓰고 덩치 큰 남자분 있죠? 그 사람이 만든 커피 진짜 맛없어요!"


"커피에 무슨 문제라도 있으셨나요?"


매니저가 물었다.


"저희 여기 근처 사무실에서 점심시간마다 커피 사가는데 다른 분들이 만든 커피랑 그분이 만든 커피랑 맛이 완전 달라요. 지난번에도 여기서 그 사람이 만든 커피를 사갔는데 완전 맛없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사무실 직원들 만장일치예요!"


"아 그러셨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조치를 취해드리면 될까요?"


"조치는 됐고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스 캐러멜 마끼아또 한 잔 주세요. 테이크 아웃 할게요."


그렇게 그녀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딱히 환불이나 별다른 조치를 요구하지는 않고 그저 커피 한 잔을 사서 총총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매니저와 나는 잠시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매장 안은 어색한 공기와 함께 멜론 Top100 히트 가요가 얄궂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며칠 전에 어떤 손님이 오셔서 커피가 맛이 없었다고 컴플레인을 넣으셨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선임이 없는 틈을 타 매니저는 사장에게 슬며시 지난번 있었던 일을 꺼낸다. 자초지종을 들을 사장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뗀다.


"흠.. 그거이 기계로 뽑는 거라 어지간허믄 비슷헐건디.."


정황상 새로 들어온 신입 앞에서 선임을 탓할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유별난 입맛을 가진 어느 손님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아무리 기계로 추출하는 커피라 할지라도 추출 버튼을 누르기 직전까지 존재하는 몇 가지 수작업 중에 그 맛이 크게 차이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흔히들 쓰는 표현인 손맛이라는 것인데 이 손맛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성격, 가치관, 습관 등의 조합에 의해 나타나게 되고 묘하게도 그것은 지문처럼 어떻게든 결과물에 흔적을 남기고 만다.


따라서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는 두루뭉술한 타협선을 가진 사람은 본인이 내는 음식도 어중간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날 우연히 밸런스가 맞아 맛있는 결과물을 얻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 같은 것일 뿐 이후에도 약속할 수 있는 일정함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나날이 지켜볼수록 그 선임이 딱 그랬다. 그가 커피를 추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늘고 일정하게 흘러나와야 할 에스프레소는 어떤 때는 홍수처럼 콸콸 나와서 너무 싱거웠고 또 어떤 때는 처마 밑의 낙숫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져서 쓴맛이 너무 강했다.


즉 손님이 찾아와 항의를 하게 될 상황이 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커피 추출의 기본은 안 돼있으면서도 라테 아트 욕심은 있었기에 사장 몰래 라테 아트를 연습하며 커피와 우유가 아깝게 버려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매사 덤벙거리기 일쑤였고 식탐은 많아 소리 소문 없이 행방불명되는 재료들도 상당했다. 나중엔 커피 그라인더에든 커피콩까지 꺼내서 씹어먹는 그를 보며 웃음과 경외심이 한 번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배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함께 생활하게 된 직장의 동료로서 열심히 배우는 척을 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는 또 머지않아 가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말았으니 바로 예비군 훈련으로 며칠간이나 결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루 직전에 통보해 온 것이었다.


보통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면 몇 달 전에 통지서가 오기 마련인데 그걸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 전이 돼서야 알려온 그를 쉽게 이해해 줄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ROTC 출신이라서 그런지 훈련 기간도 일반 사병에 비해 더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덕에 가게는 여러모로 곤란해졌고 그중에서도 당장 내일 점심부터 몰려들 손님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가 가장 막막했다.


선임은 사장의 훈계를 들었지만 지난번에도 훈련을 한번 미뤘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멍청한 표정으로 턱을 긁으며 사라졌다.




결국 다음날부터 가게는 사장의 아내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점심에 몰려드는 손님들을 받아낼 수 있었고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낸 서로를 마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을 무렵 오늘 급조되었던 사장의 아내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불편을 좀 감수하면서도 나아지길 바라면서 시간을 많이 드린 분이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좀 나아졌지만 처음엔 실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늘 떨어뜨리고 깨뜨리기 일쑤였지요."


"게다가 식대도 일정 금액으로 선을 긋는 게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어 편하게 드시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드실 줄은 몰랐답니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좀 더 그에 대한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렇다. 그는 이 가게의 고문관이었던 것이다. 그간 지켜보며 그래도 되는 걸까 싶었던 모습들은 역시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어느 한 개인의 눈치 없음이 집단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수한 것을 감싸줬다고 해서 잘한 일이 될 수 없으며 상대가 침묵한다고 해서 계속 결례를 범해도 될 리는 없다. 그렇게 자신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멋에 취해 주변을 보지 못했던 우리의 에스프레소맨은 결국 그렇게 해고되고 말았다.




-에필로그-


그가 해고된 뒤 6개월 정도가 흐른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밤이었다. 당시 마감조로 편성된 나는 홀로 가게 안에서 퇴근 전 마무리 작업을 하며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가게 문이 열리며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웬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너 여기서 아직 일하는구나? 나야 나!"


큰 덩치에 머리와 수염을 손질하지 않아 꾀죄죄해 보이는 그 거한은 바로 에스프레소맨이었다. 그는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다가 사정이 있어 이번에 귀국을 하게 되었고 이 근방을 지나다가 가게가 생각나서 들렀다고 한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횡설수설 꺼내놓다가 말을 잠시 멈추고는 주방 안쪽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시선을 고정한다.


"저어.. 오랜만에 커피 한 번 내려봐도 될까?"


"뭐 어차피 마감시간이라 손님도 없으니 그러시죠.."


어색하게 주방에 들어선 그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원두를 갈기 시작한다.


그리고 몸이 기억한다는 듯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포터 필터에 곱게 갈려진 원두를 담아낸다!


필터에 소복하게 담긴 원두의 수평을 맞추고 탬퍼로 표면을 지그시 누른다!


마지막으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필터를 에스프레소 머신에 결합하고 과감히 투 샷 추출을 시작한다!


"탈칵! 위이잉~"


..

...

....

.....


20초쯤 지났을까. 커피가 추출되기를 조용히 기다리던 나는 에스프레소 샷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음..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샷 잔 중 하나는 너무 과 추출 되어 샷이 넘쳤고 나머지 하나는 절반 밖에 차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멍하니 자신이 내린 커피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냉장고 문을 열고 키위 한 알을 꺼내 입에 쏘옥 집어넣는다.


마치 몸이 기억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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