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네가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됐다는 신입 아르바이트구나?"
짧은 머리에 커다란 덩치 그리고 안경을 쓴 남자가 나에 말을 걸어왔다.
"집은 어디야? 카페에서 일해본 경험은 있고?"
매니저로부터 간단한 인적사항을 전해 들었다는 그는 나보다 먼저 근무하고 있던 선임 아르바이트로 내가 몇 살 연하라는 사실을 알고 동생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의례적인 몇 가지 질문들을 해온다.
그렇다. 나는 이 카페에 오늘부터 일하게 된 아르바이트로 커피 머신을 다뤄본 적도 없는 신참이다.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육중한 에스프레소 머신과 난생처음 보는 핸드드립 커피용 도구들이 주방에 즐비해 있다.
특히 에스프레소 머신 가장자리에 붙어있는 스팀 밸브를 열 때마다 취이익!! 하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새하얀 증기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가 이내 사라지는 풍경은 마치 이곳이 자칫하면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위험한 장소로 느껴지게도 한다.
그리고 주방의 한 귀퉁이에서는 사장님이라 불리는 정수리가 반쯤 벗겨진 50대의 남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중이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 곁에 서서 한참을 바라본다.
"니는 여거까장 올라믄 못해도 6개월은 배워야 한다잉."
사장에게 들은 첫마디였다. 전반적인 기초를 배우기 전에는 주전자를 맡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투로 저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임 아르바이트가 어색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나를 반대편 주방 작업대로 이끌며 말을 붙인다.
"그냥 단순히 아르바이트를 때문이 아닌 커피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온 거라면 아주 잘 찾아온 거야"
"여기 사장님이 상당히 실력 있으신 분이거든"
"나도 원래 ROTC 장교 출신인데 전역하고 나서 막막한 차에 이 카페를 알게 되었고 8개월째 일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은 스타벅스? 할리스? 이런 데서 일하는 애들보다 훨씬 잘할 자신 있어!."
나는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 가게를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개인 카페를 열고 싶다는 생각으로 커피를 기초부터 천천히 익히기 위한 초석이 되어줄 일터를 찾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에게 이것저것을 배우며 오전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고 나는 선임과 점심을 함께 먹게 되었다.
"중국집 괜찮지? 이 근방에 잘하는 집이 하나 있어."
중국집이야 늘 무난한 선택이고 첫날이라 긴장한 탓에 입맛도 없던 나는 그냥 선임의 추천에 따라 함께 중국집으로 향했다.
"먹고 싶은 거 편하게 골라도 돼."
앞서 말했듯 첫 근무날에 얼마나 입맛이 있겠는가. 나는 그냥 간단하게 짜장면을 고른다. 하지만 선임은 달랐다. 일반 짬뽕보다 비싼 삼선 짬뽕을 고르고 탕수육까지 고른 뒤 또 추가로 곁들여 먹을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점심값은 가게에 청구하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많이 시켜도 되는 건가요?" 의아한 나는 물었다.
"괜찮아. 여기 사장님 이런 거로 뭐라 안 해."
급여 대비 식비를 이렇게 많이 준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지만 나보다 8개월이나 먼저 일한 선임이 괜찮다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과 혹시 오늘 첫날이라 이렇게 사주는 건가 싶기도 해서 그냥 그의 주문에 따르기로 한다.
그렇게 거하게 주문한 한 상이 나오고 첫눈에도 식탐이 많아 보이는 선임은 잔뜩 시킨 음식을 먹성 좋게 먹어치우는 듯했으나 역시 결국 양이 너무 많아 음식의 태반을 남기고 일어서게 된다.
이런 그의 식탐은 근무 중에도 종종 발견되었는데 생과일 주스를 만드느라 키위를 깎는 도중에 다 깎은 키위 한알을 은근슬쩍 통째로 입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것도 수시로..
그 외에도 뭔가 자부심 가득한 말투에 비해 실수가 잦은 것 같기도 하고 사장에게 꾸중을 듣는 등 좀 이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신입 아르바이트였던 나는 정신없는 하루와 함께 첫 근무를 마치게 된다.
집에 돌아와 정신없던 오늘 하루를 돌아보다가 문득 선임이 알려준 본인의 싸이월드 주소가 떠올랐다. 당시는 한국의 토종 SNS였던 싸이월드가 몰락하기 직전의 시기였지만 인기가 줄어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의 싸이월드 주소를 교환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로 남아있던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생각난 김에 컴퓨터를 켜고 그의 싸이월드에 들어가 보기로 한다. 주소를 입력하고 들어가자마자 그가 설정해 둔 의미심장한 BGM과 함께 메인 문구로 적어놓은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Espresso Man..."
그리고 프로필 사진란에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턱에 괴고 측면으로 시선처리를 하고 있는 그의 사진이 있었다.
에스프레소 맨이라니... 아마 당시 마블이 히어로 영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무슨무슨 맨들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점이라 그에 따른 영향과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만나 탄생한 이름이 아닐까 싶었다.
추가로 뭇 여성들을 타겟팅한 것 같은 폼나는 시적인 문구들이 여기저기 쓰여있기도 했다.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히 오글거리는 느낌이었으니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엄청나게 유치하고 보는 이에게 조차 창피함을 전가시키는 사진과 글들이었으리라...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한번 웃고 내일 출근을 위해 컴퓨터를 끈 후 잠을 청하기로 한다.
알고 보니 다음날은 선임 아르바이트의 쉬는 날이었고 그런 이유로 나는 매니저와 함께 근무하며 일을 하게 되었다. 매니저는 뚱뚱한 몸매에 뿔테 안경 그리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였다. 나를 면접에서 합격시키고 채용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내가 너를 왜 뽑았는 줄 아니?"
"다른 애들은 이력서에 온갖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적혀있던데 너는 그냥 '양심껏 하겠습니다'라고 적었더라? 난 왠지 그게 마음에 들어서 널 뽑았어."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 역시 이력서를 쓰면서 입에 발린 말들을 쓰기가 싫었던 것 같다. 나에게 맞는지 어떤지 아직 알 수도 없는 곳에 최선과 열심을 약속하는 건 오히려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양심껏이라는 말은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어떻든 적어도 순리를 지키고 서로에게 해가 되는 선을 넘지 않으며 최소한의 충족 치를 달성하겠다는 유연하면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내가 이 가게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지만 나름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의미로 선택했던 표현이었다.
그렇게 매니저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던 중 한 여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의 첫 손님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우리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녀는 인사도 받지 않은 채 씩씩거리며 카운터로 다가와 따지듯이 물었다.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 키 크고 안경 쓴 남자 있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