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커피를 맛보기 위해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신선한 원두, 훌륭한 바리스타, 그리고 좋은 장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커피를 처음 시작하면서 앞서 말한 것들을 잘 조합한 방정식을 가지면 좋은 커피를 추출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정진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커피라는 것은 그런 정형화된 방정식 안에 가두기에는 돌발적인 요소들이 많은 음료였다.
분명 심혈을 기울여 추출했지만 미묘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물을 얻게 될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커피 맛이 너무 지저분하다거나 혹은 맛이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지는 경우 말이다. 만약 원두의 품질이나 추출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가 그 원인이라면 발견도 쉽고 대처도 쉽다. 그리고 대부분 이것이 원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삶도 그렇듯이 커피 또한 언제나 이렇게 표면적이고 쉬운 문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오늘은 나만의 맛을 찾아가는 도중에 발견한 맛있는 커피의 숨은 이유들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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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배우의 연기력은 탁월하지만 배경이나 소품의 퀄리티가 형편없다면 과연 그것은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좋은 영화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물론 스크린에는 나타나지 않는 제작자들과 스태프들의 노고라는 바탕이 있어야 비로소 탄생하게 된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커피라는 음료의 주인공은 당연히 커피겠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물이라는 배경 안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다.
즉 좋은 커피를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좋은 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달리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물에는 각기 맛이 있다. 주의를 기울여보면 음식점에서 마시는 물, 회사 정수기에서 마시는 물, 편의점에서 사 먹는 생수 등 모두 맛이 어딘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물이 정수되는 환경에 따라 마그네슘, 칼슘, 미네랄 등의 비율이 각각 달라 그것이 서로 다른 맛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럼 커피에는 어떤 물이 어울릴까?
물이 중요하다지만 결국 매장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정수기 물이 아니겠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정수기 물에 약간의 조예를 가지는 것만으로 더 나은 커피 맛에 다가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바로 사용하던 정수 필터의 정수력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 문제점이었다. 극한의 정수에만 초점이 맞춰진 제품이다 보니 물의 맛에 가장 기여하는 미네랄까지 모조리 걸러내 버려 물의 껍데기를 마시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물에서 느껴지는 건조함이라는 역설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런 물로 커피를 추출할 경우 상대적으로 어딘지 맛이 밋밋해지면서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기에 추후 여러 필터들을 번갈아 테스트하면서 이상적인 물을 찾아 헤매었던 웃지 못할 기억도 있다.
그러나 커피는 물 98%와 커피 2%의 만남인 만큼 그렇게라도 물의 맛을 잡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커피가 주인공이라지만 이상적인 화선지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화룡점정 또한 없기 때문이다.
Home & Away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Home & Away라는 표현은 상당히 익숙할 것이다. Home은 자신의 팀이 평소에 상주하던 익숙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이고 Away는 그 반대로 자신의 팀이 어딘가로 원정을 가서 낯선 환경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당연히 익숙한 환경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는 홈팀이 안정적으로 기량을 뽑아낼 수 있고 이길 확률도 늘어난다.
이는 커피에도 적용된다. 커피라는 것은 아주 민감한 성질을 갖고 있고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어느 바리스타가 본인이 의도한 대로 이상적인 커피를 추출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환경을 이해했다는 뜻도 된다.
왜냐하면 환경마다 기후를 비롯한 온도나 습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커피를 보관하는 방법 또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가로 위에 언급한 물까지 변수에 가세하면 누군가가 그곳에 머물면서 이상적인 커피를 균일하게 만들어 낼 때까지는 환경적응이라는 명목 아래 무시 못 할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할 수도 있다.
즉 커피를 허투루 만들고 있지만 않다면 유명한 바리스타가 나의 주방에 찾아온다 할지라도 적어도 나의 홈 경기장인 이곳에서만은 나의 커피가 더 좋은 맛을 낼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다.
일정한 커피란 없더라
이성에게 마음을 얻고자 연애 매뉴얼을 찾아서 공부하거나 조언을 얻을 수 있을만한 누군가에게 의지해 본 적이 있는가? 아마 그 매뉴얼과 조언이 늘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고 그 사람이 지금 어떤 환경과 상황 그리고 어떤 기분에 처해있는지 깊게 대화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도 객관적인 지표로 상대의 의중을 지레 짐작해 보려는 것은 그저 요행을 바라는 도박과 같다.
그 사람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오직 한 사람이듯이 그 사람을 대해야 할 방법 또한 단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는 커피에서도 일어나고는 한다. 사람들은 일정한 커피라는 것을 쉽게 말하지만 사실 일정한 커피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를 추출한다는 것은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로 필기를 하는 것과도 같다. 연필은 글을 쓰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뭉툭해져 가는 연필심 탓에 필체에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커피도 로스팅이 완료된 순간 이후 하루하루 급격한 변곡점을 그리며 맛을 바꿔나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서 좋은 커피를 내고 싶은 마음에 바로 하루 전 탄자니아를 마시고 감동했던 기억이 떠올라 어제와 같은 요령으로 커피를 추출해 대접했지만 갑자기 그 맛이 온데간데없어져 적잖게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미리 암기된 커피의 분쇄도, 물의 양, 추출 시간 등을 의심 없이 매일 적용한다면 오늘은 맛있게 마실 수 있었을는지 몰라도 내일은 장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가 만들려 하는 커피는 언제나 세상에 둘도 없는 한 잔의 커피고 그 커피를 만드는 요령 또한 그 순간에 통용되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일정한 커피를 추구하는 길은 한결같은 초심이 아닌 역동적인 변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제 만반의 준비를 갖췄고 오늘 원두의 상태는 절정이다. 그리고 마침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쓰읍.. 하아.. 커피 향기가 너무 좋네요."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가게에 가득 퍼져있는 커피 향을 감상한다. 그리고 신중한 얼굴로 메뉴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고민하고 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나의 커피 맛을 알아줄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추천할 커피를 고르느라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마침내 그는 결정했다는 듯이 메뉴판을 덮고 활짝 웃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를 건넨다.
"아. 여기 쌍화차는 없네요? 다음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