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턱시도의 바리스타 2화(완)

by 아포드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됨-



"아.. 저 오느부터 추근하기로한 사담입미다."(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한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들었습니다."(뭐지? 저 혀 짧은 소리는?!)


그의 혀 짧은 발음이 조용한 홀에 울려 퍼지고 그것은 말끔한 그 차림새와 상반되어 다소 이질감을 느껴지게 했다. 마치 잘 차려입은 영구(80년대 코미디의..) 같다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일단 주방으로 들어오시고 오늘은 첫날이니 오픈 준비부터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함께 바닥을 쓸고 닦고, 걸를 빨아서 테이블과 의자를 닦고, 짐을 나르게 시키려니 그 복장이 참 부담스럽다. 당시 '커피프린스 1호점'이라는 드라마가 상당히 인기리에 방영됐었는데 등장인물들이 저렇게 셔츠에 베스트를 입고 출연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


드라마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과장되고 와전된 환상을 심어주기 쉬웠고 커피를 다루는 바리스타는 마술사가 입을 것 같은 턱시도나 드레스 셔츠에 수염까지 길러야 할 것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이 턱시도의 바리스타 또한 그 환상의 피해자일까 아니면 그저 복장으로 승화시킨 의욕의 표현일까?




그렇게 시간이 며칠 정도 흐르는 사이 그와 나는 나이가 동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어 서로 말도 놓게 된 상태가 되었다.


"나은 마디야 XXX 바디스타처럼 대능 게 몹표야."(나는 말이야. XXX 바리스타처럼 되는 게 목표야.)


"아.. 그래.."


XXX은 당시 국내 바리스타 대회 우승자로 본격적인 커피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상황과 맞물려 인기몰이와 함께 책도 커피와 관련된 책도 출간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커피를 마셔본 적은 없었으나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책 표지와 내용도 다소 겉멋 든 느낌이었고 평소의 옷차림도 패셔너블하기는 했지만 역시 겉멋이 강조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리스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쉬웠던 인물로서 그를 목표로 하는 이 친구가 왜 턱시도 차림으로 가게에 온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누군가를 동경하고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나 종종 허파에 들어가는 바람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그리고 허파에 들어간 바람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이 턱시도의 바리스타는 늘 원인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가게 일을 가르쳐 주면 자기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이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투로 받아치곤 했다.


"자 과일주스 주문이 들어오면 왼쪽 냉장고에 있는 것부터 쓰면 돼. 그게 먼저 다듬어 놓은 거라 먼저 사용해야 하거든." 하고 가르쳐 주면.


"서입성출응 기보니디!!!" (선입선출은 기본이지)


하고 받아치거나.


키위를 잘 깎는 요령을 알려줬을 때는.


"야~ 디겹따. 내가 호텔 두방에서도 일해꺼등. 그때 키위를 얼마나 마니 까까밧는데."(야~지겹다. 내가 호텔 주방에서도 일했었거든. 그때 키위를 얼마나 많이 깎아봤는데)


그러면서 키위 심을 멋있게 빼는 방법을 보여준다며 오히려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키위는 세로방향 기준 아래, 위로 뾰죡한 심이 있다.]


"자 이 키이를 이덯케 답고 칼을 꼬다서 딱!"(자 이 키위를 이렇게 잡고 칼을 꽂아서 딱!)


하지만 그의 섣부른 칼놀림에 키위의 1/3쯤이 떨어져 나가서 바닥을 뒹굴었고 그것은 주방을 지나가던 사장에게 목격되고 말았다.


"야! 너 뭣흐냐! 너 집에서 키위 한 번도 안 깎아봤지? 키위 깎는 거 똑바로 배워라잉. 죽는다잉?"


오.. 마침 타이밍 좋게 고소한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턱시도의 바리스타는 사장에게 핀잔을 듣는 그 순간만 잠시 움츠러들었을 뿐. 여전히 근거 없는 자신감을 뽐내며 카페 생활을 이어나갔다.


"너 사케다또 먹어밧떠? 에뜨프데소에 살어듬 넣어서 캇테일 세이커에 딱 해가지고 머그면 와 진따 마시떠라."(너 샤케라또 먹어봤어? 에스프레소에 살얼음 넣어서 칵테일 셰이커에 딱 해 먹으면 맛있더라.)


"나둥에 나 카페 열면 메뉴에 사케다또 꼭 넣을 거야. 그디고 던에 나 데빵일도 한 거 말했지? 한똑에능 베이커디 부뜨 만드러서 베이커디 카페로 차디뎌고. 아탐 사이퐁 커피도 해야디."(나중에 나 카페 열면 메뉴에 샤케라또 꼭 넣을 거야. 그리고 전에 나 제빵일도 한 거 말했지? 한쪽에는 베이커리 부스 만들어서 베이커리 카페로 차리려고. 아참 사이폰 커피도 해야지)


이처럼 매사 기본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일반적인 카페에는 잘 없는 메뉴들을 들먹이며 전문용어를 늘어놓거나 화려한 장래희망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는 결국 어느 날 한 손님의 컴플레인을 받고 슬슬 사장의 눈밖에 나기 시작하는데..




"아우! 라테맛이 이게 뭐예요! 왜 이렇게 밍밍해!"


유감스럽게도 나의 인수인계는 턱시도 바리스타에게 미처 닿지 못했는지 그의 야무지지 못한 손맛은 어느 까다로운 손님에 그 미천을 드러내고 말았다. 불과 몇 분 전 나와 근무 교대를 하며 비장한 표정으로 '지금부터 내 커피 나간다!'라는 오글거리는 대사를 내뱉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닭살 돋는 창피함 또한 내 몫인 것처럼 느껴졌다.


손님에게 사과를 드리고 카페라테를 새로 만들어 서빙한 후 돌아오자 뒤에서 지켜보던 사장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쟈를 어쩌믄 쓴다냐..."


"아니 자꾸 사람을 선착순으로 뽑으시니 그렇죠."


"우쒸..이것이 이제 막 나를 면박을 주네. 그럼 면접도 니가 보든가."


"저도 아르바이트인데 제가 면접을 왜 봐요..."


"이것이 한마디도 안지네잉. 디진다잉?"


그 뒤로도 턱시도 바리스타는 자신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다지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사장은 결국 그에게 커피 제조를 보류 시키기로 한다.


"니는 당분간은 커피는 만들지 마라잉. 난중에 테스트해 보고 통과하믄 그때 따로 말을 할랑게."


하지만 그렇게 일주일쯤의 시간이 지나갔고 턱시도 바리스타의 불만은 쌓여갔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본인의 세계관 안에서는 지금 받고 있는 처우가 가당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멀 그더케 잘못했디? 사당님 커피나 내 커피나 비듯한거 같은데."(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사장님 커피나 내 커피나 비슷한 것 같은데)


"너가 내 커피 맛돔 바바."(너가 내 커피 맛 좀 봐봐.)


커피제조를 금지당했지만 틈틈이 사장 몰래 커피를 만들던 턱시도 바리스타는 테스트용 커피를 만들기 위해 선반에 올려진 잔 하나 꺼낸다.


"쨍그랑!"


그리고 그 잔은 제대로 놓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아! 딘따 어떠카디?(아! 진짜 어떡하지?)


하필 그 잔은 평소 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잔으로 가게가 개업할 당시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고가의 제품이었다. 게다가 턱시도 바리스타는 손이 야무지지 않은 탓에 기존에도 각종 잔들을 꾸준히 깨왔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 사건은 좀 더 치명적이게 느껴졌다.


나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깨졌다고 바로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은데."


"아냐! 일단 말하디 말고 기다려보댜. 사당님이 혹시 모를 수도 있다나!"(아냐! 일단 말하지 말고 기다려보자. 사장님이 혹시 모를 수도 있잖아!)


나는 어차피 머지않아 들통날 사실이라는 것을 그에게 설명했지만 그는 왠지 끝까지 간절하게 만류했고 결국 나는 현장을 보지 못한 셈 치고 입을 닫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붙잡은 지푸라기가 밧줄로 변할 리는 없는 것처럼 며칠 못 가 사장은 커피잔의 부재를 눈치챘고 턱시도의 바리스타는 결국 사장에게 불려 가게 되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면담을 하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 한 달 전쯤 턱시도의 바리스타가 면접을 보러 가게에 처음 왔었던 날이 떠오른다. 공교롭게도 자리도 똑같은 곳이다.


둘은 그렇게 꽤 오랫동안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는 사장은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턱시도의 바리스타는 주방으로 돌아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짜..짜였다..."(짜..짤렸다...)




그렇게 그가 떠난 뒤에 떠오른 생각은 그는 커피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그냥 바리스타라는 감투를 쓰고 싶었던 것뿐이지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특정 직업이 가진 환상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는 그저 화려한 불빛에 이끌려 온 불나방 같은 매체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런 얄팍한 수는 곤란하다.


(완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