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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도슨트북 Feb 10. 2022

RM's Pick @ 윤형근

Hyong-Keun Yun


RM Instagram

Chinati Foundation 치나티 재단
Marfa, Texas, United States
Right: Untitled, 93-98, 1993. 윤형근 Hyong-Keun Yun. Oil on linen. 160.4 x 112 cm
Left: Untitled, 1978.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Douglas fir plywood. 50 x 100 x 5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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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tuny Museum 포르투니 미술관 (초청전시)

Venice, Italy

The First European retrospective dedicated to Yun Hyong-keun 유럽 최초 윤형근 회고전

다색 Burnt Umber. 1980. 윤형근.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Hyong-Keun Yun

1928 - 2007



순수한 그림일수록 어렵다.

윤형근, 1977년 일기



한국 단색화의 거장 윤형근은 이처럼 순수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럼 순수한 그림은 무엇일까? 윤형근이 생각한 순수한 그림이란 어떤 걸까? 좀 더 얘기를 들어볼까?


가득 차면 답답하고 텅 비면 심심하고 심겁고(싱겁고).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을 수가 없구나.
무(無)에서 유(有)를 그린다는 것 이다지도 어렵구나.

윤형근, 1999년 8월 7일



너무 가득 차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텅 비어있지도 않은 그런 그림, 아! 말만 들어도 힘듦이 느껴진다. 성의 없는 그림이 아니었구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윤형근은 그런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윤형근의 그림은 묵직한 기둥처럼 보이는 검은색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이기도 하고, 넓은 면이기도 하고, 사각형이기도 하고, 비스듬히 쓰러져 있기도 하고. 완전히 누워져 있기도 하고, 화폭 전체를 덮고 있기도 하다. 윤형근은 이것을 가리켜 ‘천지문’이라고 말한다.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天地門)이라 해 본다.
블루는 하늘이요, 엄버(Umber)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구도는 문(門)이다.

윤형근, 1977년 1월 일기


청다색 Umber-Blue, 1976-1977, 윤형근, 면포에 유채, 162.3x130.6cm


하늘과 땅이 열리는 천지문, 이제 보니 문처럼 보인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 이 모든 게 그림 안에 있다. 양 옆의 검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이제야 궁금해진다. 큰 문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큰 산 골짜기 사이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고요하고 정적인 태초를 만나는 듯하다. 문 틈 사이로, 골짜기 사이로 큰 울림의 메아리가 들린다. 그 울림은 어느새 내 안에서 울리는 울림이 된다. 번짐 효과가 그 깊이를 더한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검은색이 이렇게 큰 힘이 있었던가, 새삼스럽다. 가운데는 색을 칠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놓은 것인데 색을 칠하지 않은 그곳에 눈길이 간다. 묵직한 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어둠을 칠했는데, 빛이 보인다. 검은 작품을 보고 있는데 빛을 보고 있다.




1980년 서교동 화실에서 큰 붓으로 작업하던 윤형근.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이 검은색은 어떻게 내는 걸까? 국립현대미술관의 얘기를 들어보면, 블루와 엄버 물감을 섞으면 깊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검은색’이 되고, 그 후에 유화 물감에 쓰이는 테레빈유와 린시드유를 더해 원하시는 색이 나올 때까지 농담을 조절하고, 되었다 싶을 때 이를 큰 붓에 푹 찍어 면포 또는 마포 위에 여러 번 내려 그은 것이라고 한다. 더해진 오일에 따라 번지는 효과의 많고 적고 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작품을 더 깊이 있게 느끼게 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테레빈유는 송진에서 뽑은 식물성 기름으로 유화의 휘발성 효과를 좋게 하며 너무 많이 사용하면 변색이 일어나고 유화에 균열이 생기는 경향이 있고, 린시드유는 아마씨 기름을 정제하여 만든 식물성 건성유로 유화를 잘 건조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며 유화의 광택과 고착력을 높여준다. 이 서양의 유화 재료를 가지고 캔버스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면 또는 마 위에 그린다. 이렇게 동서양이 만나 우리의 단색화, 한국의 단색화 (영어 이름도 Dansaekhwa)가 탄생한다. 면포 綿布 는 목화솜(코튼 Cotton)으로 만든 하얀 천으로 마포에 비해 더 하해서 검은 물감과의 대비가 더 크고, 마포 麻布 는 우리가 흔히 삼베(리넨 Linen)라고 부르는 대마포를 말하며 면포보다는 누런 끼가 더 있다. 면포에 그린 작품과 마포에 그린 작품을 비교해서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윤현근의 작품은 이렇게 면포, 마포 위에 그려지다 보니 번짐 효과가 캔버스보다 더 크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우리의 수묵화 느낌으로 묵직하게 전해온다. 실제로 윤형근은 ‘내 그림은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의 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 밝힌 바 있다.


면포에 유채, 청다색  Burnt Umber, 1975, 윤형근, 80.6 x 100cm. 국립현대미술관
마포에 유채, 청다색 Burnt Umber & Ultramarine, 1988, 윤형근, 33.5x45.5cm. 국립현대미술관



추사 김정희 作 ‘연호사만물지종(淵乎似萬物之宗) (도의 호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만물의 종조와 같다.)



'윤형근 1989-1999' 전시장. 위 작품은 1991~ 93년에 완성된 작품. [PKM갤러리]


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 소리를 그린다.

윤형근, 1977년 일기



다색, 1980, 윤형근, 마포에 유채, 181.6 x 228.3cm,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죽은 거여

윤형근, 1980년 6월 '뿌리깊은 나무' 인터뷰


단단히 서 있던 기둥이 쓰러져 있다. 그 큰 기둥이 쓰러져 가고 있다. 하늘문이 닫히고 있다. 양 옆에 버티고 있는 기둥도 다른 기둥들의 밀림으로 언제 쓰러질지 위태롭다. 1980년 윤형근은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소식을 듣고 차 오르는 분노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집 마당으로 나가 울분을 삼키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쓰러져 나가는 것처럼, 그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처럼 물감이 흘러내리고 있다. 너무나 심플해 보이는 단색화가 이런 큰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오른쪽에서부터 김영숙(윤형근의 아내), 윤형근, 김향안(김환기의 아내), 김환기. seulsong.tistory.com/305


윤형근 X 김환기,

윤형근은 또 다른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김환기의 사위이자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환기와 함께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윤형근에게 김환기는 배움의 존재임에 동시에 넘어야 할 큰 산이었을 것이다. 15살 차이의 김환기를 ‘아버지’라 불렀고, 김환기가 미국 뉴욕 병원에서 보낸 마지막 엽서의 수취인이 사위인 윤형근이었다. 장인인 김환기와의 첫 인연은 1947년 서울대학교 미대 1회 입학생을 뽑는 시험장에서 감독관인 김환기를 만나면서 이다. 이후 서울대에 입학해서 미군정 주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 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을 당하고, 6.25 전쟁 직후 대학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시위 전력이 있다고 서울대 복학을 시켜주지 않자 다시 김환기의 도움으로 홍익대 서양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한다. 4.19 이후 이승만 정권에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청주여고 교사에서 부당한 발령을 받고 사직하고, 전쟁 중 피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1956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는 등 힘든 생활을 겪는 중에 1960년 3월 22일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도 윤형근에게는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유신체제였던 1973년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당대 최고 권력자중 한 명 이었던 중앙 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지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는다. 이때의 반공법 위반 사유가 너무나 터무니없게도, 그가 즐겨 쓰던 ‘베레모’ 모자가 소련의 레닌이 쓰던 모자와 닮아서였다고 한다. ‘숙명 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몰라요. 그 사건 이후 10년 유신시절 동안에 윤형근의 그림이 만들어졌어요.’ 조각가 최종태는 말한다.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45세 윤형근은 울분을 삼키며 예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때부터 ‘침묵의 화가’ 윤형근은 그림으로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 밝은 색채는 사라지고 ‘검은’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김환기가 윤형근에게 보낸 엽서, 1974.7.10. (김환기 사망 1974.7.25) “살자면 별 병도 생기나 보다.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 휴양하는 것도 같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같고 창밖으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내일 척수를 수술하면 언제 퇴원할지 모르겠다. 이 여름은 병 핑계로 쉴 수 밖에. 병원의 식사는 훌륭해서 좋다. 걱정들 말라. 수화”



윤형근 X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미니멀 아트 Minimal Art의 대가인 도널드 저드 Donald Judd는 1991년 인공 갤러리 한국 첫 개인전을 앞두고 1990년 한국을 찾는데 그때 동갑내기인 윤형근의 단색화와 매료되어 3점을 구매해 간다. 1993년 뉴욕의 저드 재단 Judd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1994년 저드가 설립한 텍사스주 마르파의 치나티 재단 Chinati Foundation에서 둘이 같이 개인전을 열기로 약속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음 해 2월 저드가 림프종으로 사망하면서 윤형근 개인전만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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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서러움은 진실로 아름다움하고 통한다 by 윤형근 @rk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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