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Paul Getty
당신의 돈을 셀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
If you can actually count your money, then you are not really a rich man.
-J.Paul. Getty-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그가 했던 이 말 한마디가 모든 걸 다 말해 주는 듯하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돈,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진 부자, 이 보다 더 부자가 또 있을까? 1957년 포튠지 선정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 선정되기도 하고, 1966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개인으로 그의 이름이 기네스북에 올라가기도 하는데 이때 그의 재산이 약 12억 달러(약 1조 5천억 원), 2020년 환율로 계산했을 때 약 75억 달러(약 9조 5천억 원)이라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람 폴 게티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폴 게티는 1892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어머니 사라 캐서린 맥퍼슨 Sarah Catherine McPherson (리셔 Risher)과 보험업계 변호사였던 조지 게티 George Getty 사이에서 태어난다. 조지 게티는 그 전인 1910년에 먼저 태어난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유행하였던 장티푸스에 걸려 이내 세상을 떠난다. 게티 가족은 부분적으로 스코틀랜드 혈동의 집안인데, 그의 조상이 영국에서 미국 땅으로 이주해 와서 세운 타운의 이름이 1863년 남북전쟁 때 북부의 승리 후, 아브라함 링컨이 방문하여 연설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로 유명한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스버그 Gettysburg라는 이야기도 있다.(게티 Getty의 성 Last Name + 타운, 도시라는 의미의 버그 Burg) 우리가 사진, 이미지 판매 스탁 회사로 잘 알고 있는 게티 이미지 Getty Image라는 회사는 이 회사의 초기 공동 설립자 중의 한 명인 마크 게티 Mark Getty에서 따 온 이름인데, 마크 게티 또한 장 폴 게티의 14명 손자 중의 한 명이다.
왼쪽부터 아버지 조지 게티, 어머니 사라 리셔, 폴 게티, 사라의 사촌. 캘리포니아, 1906년. George F. Getty, left, his wife Sarah Risher, right, and their only surviving child, J. Paul Getty, right, with Sarah’s niece, ca. 1906. homesteadmuseum.blog
폴 게티 나이 10살 때인 1903년에 아버지 조지 게티는 오클라오마 바틀즈빌에 여행을 가서 1,100 에이커(약 445만㎡, 약 135만 평)의 광물 채굴에 대한 권리를 사게 되는데 이게 바로 오일로 부자가 된 계기가 된다. 게티 가족은 곧바로 바틀즈빌로 이사를 가고, 몇 년 안에 한 달에 1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할 만큼 큰 성공을 이루게 된다. 이때 이미 큰 부의 성공을 거둔 백만장자 가족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오게 되는데, 현재 그의 미술관 게티 센터 The Getty 가 있는 로스앤젤레스는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다. 가족은 LA로 옮기지만, 폴 게티는 다시 오클라오마로 돌아와 폴리테크닉 하이 스쿨까지 다니는데, 독서를 좋아해 ‘딕셔너리(사전) 게티’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하고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어에 능통하고 스페인어, 아랍어, 러시아어로 대화할 정도일 뿐만 아니라 고전에 대한 사랑으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읽기 등 언어에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이후 대학은 U.C. 버클리에 입학하지만 마치지는 않고, 1910년 가족 여행에서 유럽에 매료된 후 191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취득한 후 유럽과 이집트 등을 여행한 후 1914년 미국으로 돌아온다.
폴 게티의 프랑스 운전 면허증 J. Paul Getty\’s French Driving Permit, 1930. J. Paul Getty Family Collected Papers, The Getty Research Institute, 2010.IA.17 blogs.getty.edu
미국으로 돌아온 21살 아들 폴 게티에게 아버지인 조지 게티는 오클라호마에 있는 가족 유전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투자를 위해 1만 달러를 빌려주는데 이의 성공으로 1915년 여름에 파내기 시작한 석유의 로열티 40%를 폴 게티가 얻으면서 백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되고 이게 바로 그의 초기 재정적 성공의 시작이 된다. 계속적인 사업의 성공으로 1916년 그의 아버지인 존 게티와 아들 폴 게티는 게티 오일 컴퍼니 Getty Oil Company를 설립하고 이 회사는 이후 1942년 게티 오일 Getty Oil 이 된다.
1969년에 발행된 게티 오일 컴퍼니 표본 주식 증명서 specimen stock certificate from the Getty Oil Company printed in 1969. scripophily.net
사업을 함께 하였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들인 폴 게티의 잦은 파티와 술, 여성, 빈번한 결혼과 이혼(5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5명의 아들, 14명의 손자)을 반복했던 삶을 감리교 장로였던 아버지 조지 게티는 곱지 않게 바라보았다. 사업적인 마인드도 둘은 달랐다. 아버지 조지 게티는 석유 시추에만 집중하는 사업을 하고 싶었던 반면에 아들 폴 게티는 원유 시추부터 정제, 휘발유 판매까지 통합한 이른바 ‘유정에서 소비자까지 Well to Consumer’ 컨셉의 회사로 방향을 가고 싶어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둘은 서로 부딪혔고, 이는 아버지 조지 게티가 아들 폴 게티를 사장에 앉히면서도 결코 회사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전적으로 회사를 맡기지도 않게 된다. 1930년 조지 게티가 사망할 때도 폴 게티는 조지 게티사 George Getty Inc. 로부터 ⅓ 주식만을 받고, 그 당시 80이 넘은 폴 게티의 어머니는 ⅔ 의 주식 지배권을 넘겨받아 실질적인 오너는 어머니가 맡게 된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그의 부를 늘리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도 그의 사업은 계속적인 인수(Pacific Western Oil Corporation, Tidewater Oil and Skelly Oil)와 합병(1967년 Getty Oil)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키워 나간다.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중동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해 가는데 날개를 달아 준다. 사우디아라비아 중간 지역 Saudi Arabian Neutral Zone에서 석유가 발견되기 전 체결한 현금 950만 달러, 연간 100만 달러, 배럴당 55센트 로열티 지급 계약의 위험해 보이는 그의 도박은 1953년 3월 마침내 석유가 터지면서 일약 그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올려놓게 된다.
1940년대 후반 쿠웨이트 왕실 가족과 함께한 게티(앞줄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 Getty with members of the Kuwait royal family, probably late 1940s. homesteadmuseum.blog
검소함 vs. 인색함,
그렇게 돈이 많았던 폴 게티였지만, 그의 검소함 또는 인색함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다. 1959년 영국에 살고 있던 게티는 런던의 물가가 비싸다는 이유로 차로 1시간 정도의 외곽에 생활비가 더 저렴한 72개의 방이 있는 대저택 맨션인 셔튼 플레이스 Sutton Place로 이사를 해 살면서 런던에서는 럼주와 콜라가 1달러인 반면 셔튼 플레이스에서는 10 센트라고 말하며 만족해했다고 한다. 이 저택 또한 흥정을 통해 40년 전 공작이 지불한 금액의 절반인 £60,000에 구입한다. 폴 게티는 셔튼 플레이스의 대저택에 살면서 전화가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 리뉴얼 공사 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전화를 흥청망청 많이 쓴다는 이유로 전화기에 잠금장치를 설치하고 저택 안에 코인 공중전화기를 설치했다는 일화는 그의 돈에 대한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케 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세탁비용을 지불하지 않아 손세탁을 하게 하고, 닳은 소매만 다시 기워 입고, 이면지나 여백의 공간을 재사용하는 습관으로 간혹 잘못된 의사소통이 나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시내의 도그쇼 Dog Show에 가 5 실링(약 70¢)인 입장료가 오후 5시에 반값이 되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남은 12분 동안 시내를 좀 더 둘러보고 오자고 했다기도 하며, 병에 걸린 아들의 치료비로 너무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며 아내를 나무랐다는 이야기에서는 너무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폴 게티의 저택에 놓여진 코인 공중전화 J. Paul Getty's pay phone at his British manor house, Sutton Place. lacmaonfire.blogspot.com
게티 컬렉션 Getty Collection,
이렇게 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폴 게티에게도 1930년 후반부터 영국 윈스턴 처칠의 친척인 아미 게스트 Ary Guest 가 소유한 18세기 프랑스 회화와 가구들의 컬렉션을 접하면서 수집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은 가구 수집에서부터 시작한다. 18세기 프랑스 문화의 팬인 된 게티는 대공황으로 침체된 그 시기의 미술 시장 분위기로 대폭 할인된 가격의 가구를 사 모으기 시작한다. 놀라운 건 그가 ‘유럽과 18세기 Europe and the 18th Century (1949)’, ‘컬렉터의 선택: 유럽을 통한 예술적 오디세이 연대기 Collector's Choice: The Chronicle of an Artistic Odyssey through Europe(1955)’, ‘컬렉팅의 즐거움 The Joys of Collecting (1965)’ 등 여러 권의 컬렉팅에 관한 책을 썼다는 것이다. 아트 컬렉터로서 그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컬렉팅에서도 그의 부에 대한 태도는 여실히 드러난다.
폴은 훌륭한 작품을 사는데 정말이지 비열했어요.
Paul was really too mean ever to allow himself to buy a great painting.
-친구 페넬로페 킷슨 Penelope Kitson-
그의 인색함으로 제값을 주고 사기를 번번이 거부했기에 그 외의 한정된 작품만 구매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루벤스 Rubens, 티치아노 Titian, 르누아르 Renoir, 드가 Degas, 모네 Monet 등 6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유하였다. 1950년대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 작품들에 심취하여 1954년에 구매한 로스앤젤레스 말리부 비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1974년 게티 빌라 Getty Villa 를 지어 그곳에 작품 소장과 일반인들에게 오픈 전시를 한다. 1976년에 폴 게티는 정작 이 곳을 보지 못하고 영국에서 세상을 떠난다. 또한 그의 죽음 이후로 그가 평생 모았던 작품들과 게티 재단에서 구매한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하기 위해 1997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큰 뮤지엄인 게티 센터 The Getty를 오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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