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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아 Jul 26. 2024

노트북이 글을 쓰고 있다

그날 이후로 한 달이 지났다. 권고사직. 사장은 나에게 불만이 많았고, 나 역시 그 회사와 맞지 않아서 괴로웠던 때에 그만두라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데. 짤렸는데도 타격이 없는 건, 그 회사를 언젠가는 그만둘 회사로 마음속에서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 달까지 할 수도, 올해까지만 다닐 수도 있는 회사라면 오늘까지만 일하다 짤린다고 해도 억울할 건 없다. 난 그만두라는 말에 동요가 없었고 태연했는데, 오히려 그 점이 사장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너는 왜 멀쩡하냐는 말을 들었다. 내가 짜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안 해서 괘씸한 건가. 앞으로 볼 일 없는 사이에 이렇게 깔끔하게 오케이 하고 꺼져주는 건데 사장 입장에서도 좋은 거 아닌가.   


때마침 차도 사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평일에 바다도 가보고, 한가하게 카페에 앉아 있다니, 그건 행복이지. 며칠 전에는 노트북도 샀다. 요즘은 새벽에 자고 정오에 일어난다.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다가 도서관에 간다. 원 없이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어차피 하고 싶은 건 없으므로, 사는 데 도움이 안 될 책을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사실 살면서 책이 유용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런 말 하면 발작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하루에 다섯 권 이상 읽어대는 나도 웃기고.


잠깐만, 나는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 십 수년 전에 마음이 어두웠을 때(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현실도피로 책을 선택했던 경험이 있다. 꼬박 3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에 파묻힌 시절이었다. 당시 읽은 책이 수천 권은 될 텐데, 내 인생은 요 모양 요 꼴이다. 책은 사람을 골라가며 구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도 나아짐을 느끼지 못했고, 알량한 지식 몇 푼 얻은 느낌은 있다. 그러면 뭐 하나. 요즘엔 인공지능이 다 알려주는 시대인데. 


오랜만에 블로그를 열어 책 리뷰 몇 자 적었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조회수는 0이다. 통계는 5이지만 광고쟁이 다섯이 들어와 공감에 5가 찍혀 있으니 내 글은 아무도 안 읽은 거다. 무용한 독서와 무용한 글쓰기, 완벽한 조합이다. 그럼에도 계속할 마음이 있는 건, 새 노트북 때문이다. 뭐라도 해서 뽕을 뽑고 싶은 마음, 어떻게든 생산품을 내놓아야 숨통이 트일 것 같은 기분. 


지금 글을 쓰는 건, 내가 아니다. 노트북이 지 혼자 눌려지고 있는 거다. 나는 손가락만 빌려주고 있다. 글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적당히 훈련된 사람의 몸에 들어가 떡가래처럼 길게 나오는 것이다. 그 떡가래가 그냥 먹어도 맛있을지, 꿀을 찍어야 맛있을지는 모른다. 어쩌면 떡이 아니라 똥이 나올 수도 있다. 절대 내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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