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산책. 3
1. 멀리서 보는 꽃구경(登高賞華).
춘삼월의 여흥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꽃들이 저물어 가는 시기를 맞이했다. 올해는 평년보다 2주나 일찍 꽃들이 개화하여 사람들의 춘흥을 맞이하는 긴장감도 매서울 만큼 속도감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꽃구경 가는 것을 좋아하고 봄을 만끽하였는데, 옛 문인들이 남긴 그림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꽃을 감상하는 태도는 초지일관(初志一貫)하다. 그러나 꽃구경에 아름다움 만큼이나 시들어가는 이별도 깊다. 이번 그림은 봄꽃의 여흥보단, 두보의 "바람에 꽃잎 마구 떨어지니 진정 근심스럽다(風飄萬點正愁人)."를 그림으로 느껴볼까 한다.
2. 김수철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계산은 고요하고 물어볼 사람 없으나, 매처학자의 집은 잘 찾아간다(溪山寂寂無人間 好訪林逋處士家)."
그림에 적혀 있는 제화시는 매처학자라 불리던 임포(林逋)의 이야기이다. 북산 김수철은 매처학자 임포(林逋)의 매화서옥(梅花書屋)을 그린 것이다. 임포는 중국 항주 서호(西湖) 부근 고산(孤山)의 외딴곳에서 20년 동안 매화를 가꾸고 학과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별칭이 매처학자이다.
북산이 그린 매화서옥도는 간략한 필치와 단순한 형태, 그리고 엷지만 선명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또한, 산과 바위의 음영(陰影) 표현 없이 필의 윤곽선만으로 표현되어 북산의 특징인 간결함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림은 멀고 높은 곳에서 중심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거나, 반대로 중심부에서 시선을 틀어 먼 산까지 시야를 넘기는 광각구도(廣角構圖)로 산수를 감상하게 설계되어 있다. 대관산수(大觀山水) 형식 중에서 일격구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자칫 그림의 전체적인 감흥을 잃게 해 준다. 즉, 시선의 변화가 부속장치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은은한 먹빛이 도는 설경(雪景)으로 차분함을 지니고 있다. 또한 먹빛으로 표현한 절제된 설경(雪景) 가운데 임포가 있는 서옥(書屋)과 옷은 붉은색(赤)이다. 이와 반대로 다리 건너 그를 찾아오는 이의 옷은 푸른색(藍)으로 감상에 산뜻한 대비를 이룬다. 산수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감돌고 있다.
먹빛의 은은한 설경(雪景)과 달리 매화(梅花)는 굵고 필이 선명하다. 그리고, 꽃은 호분(胡粉)으로 그렸지만 날아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설경(雪景) 사이의 매화도 중심인물들의 색채대비처럼 시각적인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있어 시선의 변화가 자칫 동떨어지다는 것을 방지시켜 준다. 이렇듯 아마 북산은 작은 인물(赤藍)들의 대비, 설경(雪景)과 매화(梅花) 등, 마치 겨울이 끝나가는 시절의 아쉬움과 함께 매화로 봄의 반가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더불어 봄의 시작을 만끽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일 것이다.
3. 겸재 정선의 심화춘감도(尋花春酣圖)
겸재 정선이 그린 이 그림은 고사를 취한 도석화로 우화등선(羽化登仙), 현실의 몸을 벗어던진 신선의 모습이다. 어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를 나타낸 것이다. 어릉중자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 나라 사람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그는 꽃을 너무나 좋아하여 꽃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다 한다.
그림을 보면 노인이 춘산(春山)에 온통 아름답게 물들인 꽃에 취해 경색(景色)하고 있다. 어찌나 감상에 빠졌으면 술병과 찬그릇까지 엎어져있다. 아니면 혹시 꽃을 술친구 삼아 겨루기 술판을 버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노인의 표정을 보면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꽃에 감흥을 이룬 표정도 아니다. 뭔가 처연해 보인다. 더구나 어깨까지 축 처져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도 세한(歲寒)의 산고를 겪듯이 아마 노인은 지난날의 회환을 꽃으로 풀려는 것 같다. 마치 "꽃 사이에서 놓인 술 한 단지,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마신다(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이백의 월하독작의 시구절을 연상시킨다.
노인이 감상하는 저 봄을 나도 모르게 이해가 된다. 사람이 나이 들어간다는 걸 느껴지게 해주는 그림이다.
4.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노년에 보는 꽃은 마치 안갯속에서 보는 것과 같다(老年花似霧中看)."
매화가 핀 절벽 언덕 왼편에 달필로 화제가 젹혀있다. 꼭 명승에 적혀있는 석각(石刻)처럼 현실감이 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로 봄의 풍경을 그린 그림 중에서 유난히 시흥의 애잔함이 특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강물에 술상을 차린 조각배를 띄우고, 몸을 비스듬히 젖혀 절벽에 핀 꽃을 감상하고 있다. 그리고 화면은 절벽과 강변 이외에는 그 어떠한 공간적 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설정이 있기에 조각배와 꽃 사이의 아득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다. 한마디로 꽃과 사람 그리고 산수 이 모두가 물아일체(物我一體)다.
그림의 언덕 왼편에 적힌 제화시(題畫詩)는 두보의 '소한식주중작( 小寒食舟中作)'의 나오는 한 구절로 그의 말년의 애잔과 고독을 여실히 표현한 시로 알려져 있다. 아마 단원은 두보의 만년이 낯설지 않아, 그의 시 한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내보자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조각배에 탄 노인은 인간의 만년 삶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꽃에다 색을 넣지 않고, 노인의 도포를 붉은색을 칠했다. 이는 관물을 감상하는 이 마음에 남아있는 마지막 정열을 표현하고 싶은 단원의 마음일 것이다.
단원의 그림과 두보의 시구는 아마, 환경이 불우하고 초라할수록 마음을 곤궁히 다듬으라는 조언일 것이다.
5. "꽃잎 마구 떨어지니 진정 근심스럽다(風飄萬點正愁人)."
꽃구경이라는 것이 즐길 때는 흥겹지만, 바람결에 흩날리고 시들면 느낀 여운만큼이나 아쉬움이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옛 문인들은 꽃구경이라는 즐거운 그림도 그렸지만, 한편으론 일찌감치 이별의 정을 담고자 꽃과 헤어지는 그림도 남긴 것이 아닐까 싶다. 만남의 여흥이 있으면, 이별의 시름도 있는 법이니 저물어 가는 봄꽃을 그림으로 선행학습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1. 오주석, 단원 김홍도, 솔, 2006.
4. 이성현,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들녘,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