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의 네 번째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은 제목에서부터 역설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얼핏 "봄밤"이라는 말은 따스한 기운과 싱그러움을 연상케 하지만, 소설집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그 속엔 겨울의 길고 차가운 풍경, 상실과 부재의 긴 그림자가 겹겹이 배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이 봄밤은 찬란하기보다 조용하고 서늘하며, 오히려 긴 겨울을 지나 마주하는 봄의 희망을 담고 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인 <아주 환한 날들>은 상실의 시간 속에서 되찾은 따스함을 보여준다. 딸과 멀어진 채 홀로 지내던 노년의 여성 옥미는 사위가 맡기고 간 앵무새와의 동거를 통해 잊고 있던 감각과 기억을 되살려낸다.
그녀가 기억의 물풀을 헤치듯 지나 과거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사라졌다고 여겼던 사랑과 온기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음을 상기시킨다. 새가 닿았던 자리만큼의 크기로 따스한 감정이 삶에 다시 스며드는 순간들은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준다.
한편, <흰 눈과 개>는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멀어졌던 관계를 그린다. 설원 위에서 다시 마주한 부녀의 모습은 냉랭하지만, 세 다리로도 온몸으로 살아가려는 강아지의 생명력을 통해 서로를 향한 미약한 애틋함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적 같은 순간을 보여준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해와 화해가 가능한 것임을, 삶이란 때로 그런 기적을 품고 있음을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소설집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실'과 '그럼에도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법'이다. <빛이 다가올 때>에서 화자는 사랑과 이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남은 이들의 삶이 어떻게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탐색한다.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감각을 통해 묘사하는 풍경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사이에서도 어떻게든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연작 <호우>, <눈이 내리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죽음과 상실이라는 압도적인 부재 속에서도 삶을 계속 영위해 나가는 인물들의 여정을 담는다. 특히 <그것은 무엇이었을까?>는 각자의 과거와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여행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면서도 끝내 '기적처럼 상처 하나 없이'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특기할 점은 소설집 곳곳에 '눈'과 '겨울'의 이미지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마치 삶의 어느 한 시기가 영원히 겨울에 머무를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작가는 겨울의 한복판에서도 봄을 기다릴 수 있다는 희망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그래서 소설집의 제목이 <봄밤의 모든 것>인 것은, 겨울이 끝난 후 맞이하는 봄밤이 아니라 겨울 속에서도 존재하는 봄의 감각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삶의 어두운 측면, 특히 잃어버린 것들의 공백과 그것이 남긴 흔적을 섬세하고 절제된 언어로 포착한다. 그녀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특별하거나 영웅적이지 않다. 오히려 누구나 겪을 법한 이별, 오해, 상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살아가려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야말로 독자로 하여금 깊이 공감하게 하는 힘이 된다.
이 소설집은 상실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조용하고 따뜻한 응원이다.
겨울의 긴 그림자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살아가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겨울의 끝에서 맞이하는 작은 봄, 조용하지만 강한 빛을 보여준다. 그 빛은 독자들에게도 다정한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