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건축'은 더 이상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다. 우리는 건축을 통해 시대정신을 읽고, 공간을 통해 인간의 집단 심리를 추론하며, 도시를 통해 사회의 권력 구조와 계층 구도를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건축 입문서나 역사서가 아니다. 공간이라는 감각적 구조물을 매개로 삼아, 인류사의 큰 흐름을 성찰하는 교양 인문서다.
책은 선사시대 모닥불에서 시작해 스마트 시티로 끝나는 17개의 공간 혁명을 한 층씩 밟아 올라가는 구조를 취한다. 단순한 시간순이 아닌 ‘공간적 패러다임의 진화’라는 내러티브 구조를 갖춘 구성이 흥미롭다. 각 장은 건축물이 아니라 ‘건축이 만들어낸 사회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피라미드를 통해 물류와 권력의 집중, 도서관을 통해 정보의 저장과 진화, 수정궁을 통해 계층의 평준화와 소비자의 탄생, 그리고 스마트 시티를 통해 도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는 상상력까지 확장된다.
저자는 말한다. “공간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결정한다.” 이 얼마나 심오한 문장인가. 우리는 종종 법이나 제도, 윤리로 인간 사회의 질서를 설명하지만, 정작 **그 질서가 발현되는 무대가 ‘공간’**이라는 사실은 놓친다. 저자는 건축 공간을 통해 그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진화해왔는지를 차분히 되짚는다.
예컨대 피라미드에 대한 분석이 그렇다. 저자는 그저 기술적 경이로서 피라미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일강이라는 초기 물류 시스템을 연결한 거대한 국토 통합 프로젝트, 그리고 그로 인해 가능해진 파라오 체제의 유지라는 사회적 통치 구조의 상징물로 바라본다. 건축물이 아니라 '국가 운영 장치'로 피라미드를 읽어내는 것이다.
수정궁은 또 다른 차원의 분석을 제공한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은 당시 영국의 계층갈등을 봉합했다. “모두를 압도한 공간이 새로운 사회 계층인 ‘소비자’를 탄생시켰다”는 저자의 해석은, 건축이 단지 갈등을 무마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사회 정체성을 탄생시킨 촉매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책이 단순히 과거의 건축물들만 나열하고 그 의미를 되짚는 데 그쳤다면 이토록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통찰하고,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데 있다. 저자는 지금 이 시대에 진정한 공간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파트를 재탕하고, 쇼핑몰을 반복하는 신도시 개발로는 지금의 계층·세대·문화 간 갈등을 절대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건축, 새로운 공간이야말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열쇠다.
이 책은 건축가의 눈으로 쓴 것이지만, 오히려 건축 외부의 시선에서 건축의 본질을 더 잘 들여다본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건축물보다 그 속의 사람들에 머물고, 구조보다 관계에 천착하며, 양식보다 이야기의 힘을 강조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건축과 인문학의 경계에 선 드문 작업이며, 동시에 건축가에게는 사회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기도 하다.
『건축은 사회를 어떻게 진화시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독자, 건축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가 왜 새로운 공간을 갈망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은 충분히 깊이 있는 영감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다시, 공간으로 세상을 바꿔야 할 때다."
그리고 그 믿음에는, 긴 역사의 증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