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사합의금의 귀속을 둘러싼 부모 간 분쟁에서 법원이 본 ‘실질’
2025년 5월, 전주지방법원 제3민사부는 부당이득금 반환을 둘러싼 한 모자의 분쟁에서 피고(부친)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고(모친)는 로우더 후진 사고로 사망한 아들에 대해 수령된 형사합의금 중 자신의 몫을 돌려달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식상의 상속인 지위만으로는, 실질적 관계가 단절된 채 살아온 25년을 뒤집을 수 없었다.
■ 사건의 발단 – 유족 간의 단절된 25년, 그러나 하나의 죽음
이 사건의 중심에는 안타까운 산업재해 사고가 있다. 2020년 5월 18일, 익산시 도로 포장공사 현장에서 건설장비 로우더가 후진하던 중 작업 대기 중이던 남성(C, 이하 망인)을 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같은 날 병원에서 사망했다. 망인의 유족은 생전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성(G)과 친부(피고 B), 그리고 친모(원고 A)였다. 그런데 원고와 피고는 1995년에 이미 이혼했고, 원고는 이혼 이후 망인과 어떠한 연락도, 교류도 없었다.
이 사고로 가해자 측에서는 두 차례 형사합의가 이뤄졌다. 첫 번째는 로우더 차주 및 운전기사와의 6천만 원 합의, 두 번째는 공사 관련 업체들과의 6,300만 원 합의였다. 이 두 합의 모두 피고와 사실혼 배우자인 G가 유족 자격으로 체결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2년 뒤, 원고가 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사망자의 어머니이자 상속인이니, 합의금 4,100만 원은 내 몫이다. 피고가 이를 모두 가져간 것은 부당이득이다.”
■ 형사합의금, 상속인의 몫인가 유족의 몫인가
법원은 이 사건에서 “형사합의금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주목했다. 원고는 형사합의금의 1/3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판단은 이렇다. “단순히 상속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형사합의금의 일부를 당연히 귀속받는다고 볼 수 없다. 형사합의는 실질적으로 피해자와의 인간관계 및 책임관계를 전제로 한다.”
재판부는 여러 사정을 고려했다. 원고는 망인이 18세가 되던 해에 피고와 이혼한 후, 무려 25년간 단 한 차례의 연락도 없이 살아왔고, 망인의 생전 사실상 가족은 피고와 G였다. 사고 이후에도 피고와 G는 언론제보, 1인 시위 등을 통해 망인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가해자 측의 형사합의가 성사되었다. 다시 말해, 합의금은 법적 ‘상속인’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 ‘유족’으로서 망인을 위해 활동한 자에게 돌아간 것이라는 것이다.
■ “유족의 명의 없는 합의도 무효인가?” – 형식과 실질의 경계
합의서에는 “피해자 유족 전원과 합의한다”는 문구나, “원고가 이의를 제기하면 피고가 책임지겠다”는 다소 모호한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법원은 이를 ‘원고에게도 금전이 귀속됨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합의금에는 민사적 손해배상적 성격이 포함되지 않으며, 설사 형사합의금의 지급 당시 가해자들이 유족 전원과의 합의를 원했다 하더라도, 그 합의금의 실질 귀속은 실제 유족으로 기능한 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원고는 이미 별도의 민사소송을 통해 공사업체들로부터 위자료 및 손해배상 명목으로 1억 4천만 원을 수령하였고, 그 절차에서 스스로 피해자 유족으로 보조참가하기도 했다. 법원은 이러한 사정을 들어 “원고는 자신의 권리를 별도로 행사해 보상받았으며, 피고가 수령한 형사합의금에 원고 몫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 부당이득 판단에서 본 ‘정의’의 실현
결국 법원은, 피고가 형사합의금 전액을 수령하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부당이득을 구성하지 않으며, 원고는 피고에게 아무런 손해나 권리 침해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청구를 기각하였다. 1심은 일부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였으나, 항소심은 이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이 판결은 단순히 부당이득법의 해석 문제를 넘어, 가족 관계의 단절, 실질적 유족성과 형사합의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법적 지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실질과 완전히 괴리된 껍데기일 경우, 법원은 ‘형식보다 실질’을 따질 수 있다는 판단을 명확히 한 것이다.
■ 마무리하며 – 이름뿐인 가족, 진짜 유족
가족이라는 이름은 법적 지위에 의하여 인정되지만, 법은 때때로 ‘이름뿐인 가족’과 ‘실질적 가족’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형사합의금은 단지 상속재산처럼 나눠지는 대상이 아니다. 피해자의 삶과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책임을 감수하며, 사회와 맞섰던 사람에게 그 몫이 돌아가는 것이 정의에 더 부합할 수 있다. 이 판결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법은 사람의 고통을 단순히 수치로 환산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진심으로 분노하고 싸운 사람에게, 법은 오늘도 조용히 손을 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