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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Dec 09. 2024

문성공 안향을 기리는 영주 소수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1

   ㅡㅡ역사기행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중종 37년(1542)에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 출신의 고려 시대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인 사묘를 세웠고, 다음 해에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서원 자리는 원래 통일신라 시대 사찰인 숙수사가 있던 자리로, 안향이 젊은 시절 공부하던 곳이다. 이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 4년(1549)에 왕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과 서적을 하사 받는 등 국가의 지원과 공인을 받음으로써 서원 제도 정착에 이바지했다. '소수'라는 서원 이름은 학문을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소수서원은 배치가 독특하다.


 소수서원의 입구 지도문을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경렴정이 있고 왼편에 성생단이 있다. 성생단은 제사에 쓸 제물을 검사하는 단으로, 소수서원에서는 의식의 순서를 적은 홀기에 따라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1일)에 제향을 지낸다. 제향 전날 선택한 제물을 올려 두고 흠집 여부를 살펴보던 곳이다.

 여느 서원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구조다.

 

경렴정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대표적 유식 공간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지도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중종 38년 (1543)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웠다.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 불교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을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가 있었다.

 안향이 성리학을 공부하던 이곳에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셨고 숙수사는 현재 이전하였다.



 소수서원 옆으로 죽계천이 흐른다. 폭이 제법 넓은 죽계천을 징검다리로 건너가면 취한대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징검다리에서 사진을 찍느라 단번에 건너기도 어렵고 사진 찍기도 힘들어 한참을 기다렸다가 취한대는  들러 앉아보지도 못하고 먼 거리에서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죽계천


 강학당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로 학문을 가르치는 소수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일반적 한옥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형식이다. 강학당 내부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 현판이 걸려 있다. 백운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전 이름이다.


 강학당 뒤편으로 앉은 일신재와 직방재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독특한 구조인데 편액으로 양자를 구분한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서재로 신방이라 불리었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2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  자 형태로 되어 있다. 지락재는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 하여 앙고재라고도 한다. 학구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나, 어린 학생이 생활하는 공간이어서 동몽재라 했다.

일신재와 직방재


 소수서원 문성공묘는 중종 37년(1542)에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고향인 순흥에 세운 사당으로 소수서원이 세워지는 계기로 제공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당에는 사祠자를 사용하고 나라의 왕이나 큰 인물을 모시는 곳에는 묘廟호를 쓰게 하였다. 이를 보면 문성공묘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문성공 안향을 기리고자 격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담장도 높아 까치발을 하고서 겨우 사진 한 장을 찍을 수 있었다.

 

문성공묘


 전사청은 향사 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하는 곳이다.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했던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 같은 곳이다.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건물로 조선시대에는 도동각, 또는 영정실이라 하였으며 안향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나도 소수서원에서 처음 보았는데 사실 소수서원에 보물급 영정이 많아 특별히 소수서원에 영정각을 건립했다 전한다. 열린 영정각 문 사이로 안향의 영정이 보인다.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일영대는 해시계로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소수박물관에서 특별기획전도 전시되어 있었다. 바느레고분은 처음 들어보는 무덤 형식이다. 고분 모양도 특이하다. 바느레고분은 신라의 굴식돌방무덤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느레고분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하며 도굴로 파괴되어 여름이면 내부에 빗물이 가득 찬다고 한다. 고분 내부의 물로 목욕을 하면 피부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마을 사람들의 목욕탕으로 이용되었다 전한다.

 


 소수서원의 독특함도 재미있고 소수서원의 가을빛도 멋지다. 소수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특별 전시관은 ㅡ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화양연화 ㅡ혼인하여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유물로 자연스럽게 풀어나가 관람객들이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고 밝힌다.

 소수서원과 이어지는 선비촌의 고택들도 구경할 만하다. 고택들이 체험관으로도 활용할 수 있고 숙박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둘러볼 만하다.

 
 낮기온은 덥다.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려니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할인되는 앱을 깔아 입장료를 반값으로 할인받고 여유로이 둘러보다 문득 조선시대 선비들이 살았던 서원의 규모만큼이나 비례하는 권력의 무게 앞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서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더께로 덮어졌을까.

 죽계천 옆 취한대에서 한량처럼 다리 뻗고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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