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문이 닫혔다. 서악서원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외삼문 중 중앙을 제외하고서라도 하나는 열려 있어야 한다. 지나는 객이 들여다볼 수 있게. 특히나 경주는 어딜 가나 문화의 도시이며 역사 도시 아닌가. 그런데 서원 문이 닫혀 있다니! 더군다나 큰길가에 바로 위치한 근접성이 꽤 괜찮은 곳이고 경주 최초의 서원이라 할 만큼 유서 깊은 서원인데 문이 닫혔다. 흔들어 열어도 삐끄덕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 미동도 없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아볼 수 없다.
경주는 그런 곳이면 안 된다.
서악서원 정문이 닫혀 있어 좀 멀찌감치서 영귀루를 찍었다. 영귀루는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정진하라는 이유로 주변 경치가 잘 보이게 2층으로 지었다 한다.
서악서원은 경주 최초의 서원이며 김유신 장군과 설총, 그리고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조선 명종 16년 (1561)에 경주부윤 이 정이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비롯하였다. 2년 뒤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서악정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편액의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원진해가 썼다고 전한다.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이후에 다시 세웠다. 인조 1년(1623)에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 형식이다. 강당인 시습당이 있고 뒤쪽에 사당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헐리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경주 옥산서원과 함께 경주의 유서 깊은 서원이다.
특이하게 서악서원이란 현판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다. 이는 국가에서 지원을 받은 사액서원이란 것을 의미하며 왕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았다고 전한다.
유서 깊으면 뭐 하나, 문이 닫혔는데.
사당엔 현판이 없는데 이는 서악서원이 세워질 때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면서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를 함께 모시자 했을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염려를 했다고 전한다. 학자와 장군의 위상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정에서 사액을 받은 후 경주 유생들은 김유신 장군을 빼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을 모시고자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한 경우였다. 후에 위패 위치나 제향 시기 등 다양한 부문에서 갈등이 생겨 현판 이름을 없앴다고 전한다.
온 사방을 다 둘러도 들어갈 다른 문이 없다. 이런 젠장,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어떤 이는 전화하라는 메모지도 봤다는데, 전화를 해도 전화 안 받는다고 그랬는데 나는 메모지는커녕 어떤 문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에 은행잎은 세차게 떨어지고 있는데.
몇 번을 서성이고 손으로 밀쳐보고 눈길을 돌려봐도 내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인근 태종 무열왕릉으로 발길을 돌린다.
태종무열왕릉비
입장료는 2천 원이다. 평일이라 주차할 곳은 넉넉한데 주말이면 꽤 복잡하겠다. 태종 무열왕릉은 선도산 동쪽 능선 끝부분에 자리한 큰 무덤 5기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이름은 춘추이고 진지왕의 손자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진골 출신 중 최초의 왕이다.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를 장사 지낸 곳은 영경사다. 시호는 무열이고 묘호는 태종이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석 위 몸체 머릿돌에 용을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이 비석은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최초의 것이다. 비석은 몸체가 없어진 채 거북 받침돌 위로 머릿돌만 얹혀 있다. 머릿돌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라고 새겨 놓아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 수 있다. 등 중앙에 비석을 세우기 위한 네모난 홈이 있고 주위를 연꽃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머릿돌은 좌우에 3마리씩 용 6마리가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다.
문무왕 원년 661년에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당시 명필가로 유명한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쓴 글씨를 새긴 것이라 전한다.
김인문(앞)묘와 김양(뒤)의 묘
김춘추 태종무열왕릉 동편에 김 양과 김인문의 묘가 있다.
태종무열왕의 9대손인 김 양은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재위 838~839)을 몰아내고 신무왕(재위 839)을 추대해 모셨으며 신무왕이 죽자 문성왕(재위 839~857)을 다시 모셨다. 50세로 죽자 문성왕이 애통해하며 제1관등인 각관을 추증했고 무열왕의 능역에 장사 지내면서 장례 절차를 모두 김유신의 예에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일찍이 당에 숙위 하면서 신라와 당의 관계 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당에서 관직을 지내다 죽자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리고 서악에 장례를 치르게 했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태종무열왕릉 뒤에 마련된 4개의 고분이다. 선도산에서 경주평야를 향해 동쪽으로 뻗어나간 작은 능선 위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내부는 돌식골방무덤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는 1817년 이곳을 방문하고 <동경잡기>를 참고하여 산 위에서 아래로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현안왕의 무덤이라 추정했지만 현재는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전한다.
능 주변을 돌아보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바람도 불고 또 다른 능을 봐야겠기에 태종무열왕릉을 한 바퀴 더 돌고 건무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