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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공 이황을 기리는 안동 도산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3

by 어린왕자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림의 발의로 1574년 도산서당 뒤편에 세우기 시작하여 1575년 낙성이 되자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576년에는 퇴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792년에는 정조가 퇴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향사에 필요한 물품을 친히 내리고 특별시험인 별시를 도산서원에서 열기도 했다.

그 후 도산서원은 19세기 후반 서원철폐령에도 영남 유학의 중심 역할을 해온 중요성을 인정받아 철거되지 않았다.

농운정사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다. 건물은 장인공工 자 모양으로 하였는데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퇴계가 설계하였다.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쪽 마루는 시습재ㅡ공부하는 곳, 서쪽은 관란헌ㅡ휴식 공간, 마루 뒤쪽에 있는 지숙료ㅡ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던 곳이다.

마루가 있는 곳은 어김없이 올라가 앉아본다. 좌우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살펴보다 감히 눕지는 못하겠다. 퇴계 선생이 회초리 들고 올라오실 것만 같다.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퇴계가 만년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퇴계가 머물던 방의 이름이 완락재인데 '완성하며 즐긴다'의 의미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현으로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발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매표소를 지나면 도산서원으로 걸어가는 입구에 붉은 단풍이 선연하다. 마음은 급하고 둘러볼 곳은 많고 그렇다고 뛰어가기엔 풍경이 너무 아깝다. 눈에 담기 바쁘다. 도산서원을 가려고 일찍 움직였는데도 4시쯤 도착했다. 체험활동도 끝나 장막을 거두는 시간이었고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거리가 제법 쌀쌀하게 닿았다.

열정과 몽천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 때부터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은 역경에 나오는 '물이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 라며 열정과 관련된 시를 짓기도 했다. 도산서원 입구에 있다.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퇴계는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의미를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뜻한다. 한 방울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았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세워졌다. 경학을 공구하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전교당은 대청과 서쪽에 한전교라는 온돌방이 있다. 도산서원의 원장이 머물렀던 한존재의 문을 들어 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정면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 무릎 꿇고 올라가 본다. 채 유교의 기본도 익히기 전에 관리인이 와서 나가라 한다. 5시에 문을 닫는다고. 아뿔싸,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도 찍지 못했는데 이걸 어쩌나.


도산서원의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다. 소란스러운 아이들이 한바탕 쓸고 간 전교당 자리에 양반 자세로 앉아 본다. 공부할 만하다. 하늘 천 따 지. 얼른 나가라 신다.

도산서원의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은 퇴계가 직접 썼다고 한다.


고직사는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는데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사청은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지낼 때 제주와 제수를 보관하던 곳이다.

장판각은 도산서원에서 만든 책의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퇴계의 문집, 언행록 글씨 등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였다. 목판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2003년 목판 전부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정우당


도산서원 안에 있는 작은 연못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깨끗한 벗이 있는 연못'이란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 피지만 더럽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상징하였다.

상덕사는 퇴계와 제자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상덕사는 1574년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사당은 간결하게 맞배지붕으로 짓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상덕사와 같은 때 지어진 삼문은 가운데 문은 혼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쓰지 않고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 두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한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시사단


시사단은 조선시대 특별 과거시험을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이 있는 곳이다. 시사는 선비에게 시험을 보인다는 뜻이다. 1792년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퇴계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열고 영남 지역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문과급제 두 명을 선발하였다. 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이곳에 단을 세우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썼다.

안동댐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도산서원과 마주 보이는 강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1975년 안동 댐 건설 이후 원래 있던 자리에 십 미터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아 올린 뒤 옛 건물과 비석을 원형대로 옮겨 지었다 한다.


도산서원을 나오면서 해 질 녘의 시사단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는다. 이 죽일 놈의 자연, 우찌 저리 황홀한지 도산서원이 앉은자리가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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