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시습이다>를 읽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비분강개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벼슬을 거부하며 유랑했던 '설잠' ㅡ 매월당 김시습.
어린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아남은 자가 견뎌내야 하는 끈질기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삶.
죽음이 가치 있는 삶이었을까?
살아남은 것이 가치 있는 삶이었을까?
그것은 맞고, 그것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것도 비난할 수 없다.
끝까지 자기가 가야할 길을 가야 했던
그 선택이 그들에겐 아픔이었을테니까.
충신불사이군ㅡ
'서리 맞은 단풍잎은 봄꽃보다 붉다.'
피와 혼란의 역사 속에서 살다 간 그의 삶은 화려한 꽃보다 서리 맞은 붉은 단풍이었다.
신동 김오세는 아홉 살 무렵 세종의 눈에 띄어 승정원으로 들어가 재주를 시험 받은 후 출사를 희망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면서 공명을 이루고 임금을 충성으로 보살피는 고결한 신하가 되기로..
이후 문종이 승하하여 현릉에 묻히고 열두 살 어린 세자가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금상에겐 든든한 조력자가 없었다. 그의 곁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숙부들만 있을 뿐이었다.
ㅡㅡ우리가 배워왔던 '계유정난'은 변란을 일으킨 수양측에서 그 일을 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한다는 의미에서, 즉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수양대군이 어린 임금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조정 대신과 선비들을 무차별하게 학살시킨, 정치적 탄압인 '사화'로 본다는 것이다. ㅡㅡ본문
이후 계유정난에 반대하는 이징옥의 난 등이 잇따라 발생하였고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그럼에도 김시습은 어린 임금이 하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왕위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벼슬길로 나아가 영릉께서 꿈꾸신 인의의 세상을 펼치리라 마음먹었다.
계유년(단종1년, 1453)ㆍ조선 왕조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 계유사화가 일어난다.
1455년 윤유월 열하룻날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으로 물러 앉는다.
이에 분노한 김시습은 출사를 포기하고 출가를 결심했고 어린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낡은 가마에 태워져 이십여 명이 넘는 군사들에 둘러싸여 한양을 떠나 청령포로 보내졌다.
그리고 왕대비를 군부인으로 강등하고 폐서인하여 궁 밖으로 쫓아냈으며, 상왕의 모후인 현덕왕후도 폐서인해 현릉을 파헤쳐 물가에 있는 일반 무덤으로 옮겼다. 종묘에 모셔져 있던 왕후의 위패도 불태웠다.
상왕이 복위할 수 있는 모든 명분을 깡그리 없애는 것이다.
청령포에 계신 상왕을 뵐 기회를 만들었다. 영월 호장 엄홍도의 도움으로 지나가는 승려 행세하며 뵙기를 청했다.
"부디 이대로 오래 계셔 주십시오. 더 이상 나쁜 일은 겪지 마십시오. 옥체 보존하시어 신들 곁에 오래오래 계셔주십시오."
그대 같은 충신들이 있어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비록 쫓겨났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들의
임금이니까요. ㅡp91
금성대군이 상왕을 복위시키는 일이 발각되자 수양대군은 금성대군 사사를 결정하면서 상왕도 사사시킨다.
스물네 살의 김시습은 방랑을 시작한다.
눈부신 젊음의 시간을 방랑으로 보낸 것은 내 꿈을 포기하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토록 빛나는 재주를 주고서도 그것을 펼칠 기회는 아예 주지 않는 하늘에 대한 원망, 버려도 버려도 끝내 버려지지 않는 찬란한 미래에 대한 미련. ㅡㅡp99
그토록 머물고 싶었던 경주 금오산 용장사.
'내 몸은 용장사에 이렇게 쉬고 있다만, 내 슬픔 쉴 곳은 과연 어디일 것인가!'
그럼에도 그는 잠시 세조를 인정하는 글을 썼고 효령대군의 제안으로 불경 언해도 받아들였다. 현실을 인정하면 슬픔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그러기에 그 비감이 너무나 뿌리깊었다.
억지로 그 슬픔을 털어 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고 용장사 근처에 초막을 짓고 '매월당'이라 이름 짓는다.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금상을 인정하는 글을 썼고 공명을 이루고 싶은 미련 때문에 역경 사업에도 참여했지만 다 부질없었다. 이제 어지러운 바깥세상 일은 잊고 이제 조용히 이곳에서 생을 살아가리라."
잠시 흔들린 것이 부끄러웠다.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가야할 길을 가기로 했다.
유난히 많이 울었던 날 김시습은 금오산실 시절에 기록했던 5편의 이야기 ㅡ<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ㅡ를 한 권의 책 <금오신화>로 묶어 낸다. 결국 자신 속에 꽁꽁 뭉쳐져 있던 응어리를 풀어내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바랐다.
사람들이 이 작품을 단순히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로만 읽지 않기를, 그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읽어 주기를, 그가 왜 이토록 울며 방랑했는지 그 이유도 알아 주기를.
진정한 그의 바람은
훗날 사람들이 이야기의 행간에서 내 삶을 읽어 내고 역사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종묘와 사직을 위하는 길이었다고 미화되고 거짓 명분으로 포장된 상왕의 양위가 사실은 왕도 정치를 꿈꾸었던 수많은 선비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불의한 찬탈이었다는 진실ㆍㆍㆍ
김시습 나이 서른넷이던 무자년(세조14, 1468) ㆍ억만년을 살 것처럼 악착스레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의로운 신하와 선비들을 숱하게 살육하더니, 왕위에 오른 지 고작 십사 년 만에 세조는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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