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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Nov 16. 2023

문 밖의 기도

몸을 낮춰 생명을 끌어안는 햇살처럼


푸른 하늘이 말갛게 구름을 걷어내고 멀리서 솟아올랐다.  어디서부터 하늘이고 어디서부터 바다일까.  모르긴 해도 부서진 파도가 하늘가에 걸려 비단옷을 펼쳤나 보다.


파도는 파랗다.  눈부시게 파랗다.  수많은 사람들이 푸른 바다를 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또 건강하게 해 주세요.  바람들이 비단 한 폭 언저리에 닿아 조용히 내려앉겠지.  푸른 하늘은 말없이 푸른 바다를 내려본다.  물컹하게 몸을 낮춰 생명을 끌어안는다.  




초하룻날부터 산사가 붐빈다.  영하로 떨어졌다는 매서운 바람이 지나는 여인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실로 이 가을에 이런 추위는 견뎌내기 힘듦이라.  바람맞아도 햇살 한 줌에 누그러질 텐데 오늘은 햇살마저 어색하다. 얼음이 얼었다,  눈이 내렸다, 똑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도 제각기 맞는 농도는 다르다.


운수 좋은 날이다.  탑문이 열렸다. 하나 둘 신발을 벗고 경건하게 안으로 향한다. 신발주머니에 살포시 걸었던 짐을 내려 포갠다. 너 아니었음 이런 행운도 없었을 터.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꿈도 소원도 다르지만 하나같이 모두 똑같이 부처님을  바라고 섰다. 만인의 어버이시여, 상처 없도록, 아프지 않도록 곱게 아문 두 발 사이로 하늘을 얹는다.





얘가 누고?  콧구멍에서 휴지가 나온다.  콧구멍으로 휴지를 쑤셔 넣어야 하는데 얘는 쑤셔 뺀다.  코피도 하얗다.  각진 코피 하나를 뽑아 들고 손을 닦아낸다.  닦이는 건 바람 때문에 젖은 하얀 콧물이다. 젖은 바람을 안고 들어오는 이를 보며 저 애는  생각에 잠긴다. 코를 풀어?  말어?  거대한 얼굴에서 스며 나오는 빛이 압도적으로 희다.  


갑자기 추워진 아침에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를 날린다. 하, 입김을 불어대는 야무진 입술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서로의 몸을 만지며 살아있음을 내비친다.  손으로도 덥히고 몸으로도 덥히고 우리는 숨을 쉴 때마다 웃음을 날린다.  추위는 아무것도 아냐, 분명한 건 우리는 살아있다는 거.  





가을이 온 뒤로 담쟁이의 초록은 더 짙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담쟁이 너도 성큼성큼 기어오르고 있었다.  말 없는 채로, 온다 간다 한 마디 하지 않는 채로.  누가 바라봐도 그만, 따사로운 양지에 붙어 이때껏 살아내고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 준다.  


누가 여기에 너를 갖다 놓았을까.  아름드리나무에 붙어 사랑받아도 좋았을 텐데. 숲 속을 거닐어도 좋았을 테고 궁궐의 주인이 되어 물들어가도 좋았을 너였는데.

알은 체도 하지 않는 이곳에 담장을 타고 오르는 애처로움을 봐주는  이 없어도 너는 여기 왜 올라가고 있을까.  하늘은 너를 향해 쓰러진다.  


누구보다 열심히 걸어온 담쟁이는 이탈할 줄도 모른다. 장맛비가 쏟아져도 눈보라가 쳐도 아찔한 담벼락에 매달려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얽히고설킨 발바닥에 생채기가 나도 대지를 향해 푸르게 푸르게 나아가고 있다.  

미련이 없는가, 불평이 없는가.  장엄한 생을 뉘이며 수직으로 수직으로 올라만 간다. 굳건히 빈 하늘을 지키고 섰다.




메말라버린 웅덩이 안에 덩그러니 파란 바가지 갈 길을 잃었다. 물 한가득 품고 오가는 나그네 발길 가볍게 해 줘야 하는 게 그의 희망이라면 어찌할까, 저리 아파하는 걸.  각기 살아내려 버티고 있는데 파란 바가지는 어쩔 수 없는 몸부림으로 지쳐간다.  


나이가 들면서 나도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제 갈 길 열심히 가고 있는 자식들에게 기대지 않으려면 부단히 애써야 했다.  떳떳하게 내 몫을 갖고 있어야 했다.  나는 그게 내가 좋아서 하는 '읽고 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돈까지 벌게 해 주면 더없이 좋은 일이고 손에서 놓지 않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늘 자답한다. 떳떳하고 우아하게 늙어가고 싶은 욕망이다.  


우물 안 파란 바가지도 희망이 있었을 터. 자신의 바람 위에 바람이 고이고 낙엽이 머물다 가는 안식처가 되고자 했을 터. 누가 위로라도 해 주자, 괜찮다고, 가을이 가기 전에 너의 바람대로 바람이 앉았다 갈 거라고. 다시 둥둥 떠오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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