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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Nov 14. 2023

고요가 도착했어요

토곡정원에


한창이어야 할 가을이 머뭇거리고 섰다.  아니 푸름 자체로 을씨년스러운 초록을 입고 섰다. 보드득 보드득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추억을 부르는 시어가 어색하다. 바람을 일으켜 돌고 싶다.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 품고 싶다.


가을은 아직 멀다.  달려오는 바람에도 고개 떨구고 수줍은 듯 시린 웃음 날려야 하는데 아직 가을은 저만치 멀다. 황금빛 사이에서 붉은 햇살은 오히려 검게 스며들고 입구 붉은 솟대 하나가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은행잎은 떨어졌다.  예쁘게 물들어 떨어질 시기는 아닌데 목이 타 오히려 떨어져 밟히고 있다. 아기 업은 초보 엄마가 설렘 안고 미소 지으며 셔터를 연신 누른다. 마음에 담는 가을이  예쁘구나, 정말 예쁘구나. 아기의 미소를 입혀 파아란 가을을 가슴에 담고 있다.  


그래예쁘다.  



물빛일까 하늘빛일까 아련한 은행잎 하나가 살랑댄다. 포말을 일으키며 겹겹이 솟은 노란 청춘들은 하늘 향해 뻗어 가지를 다듬고 수평선 너머에 곱게 수줍다. 너의 젊음은 그랬다. 하늘빛에 반사되어 억겁의 무게를 짊어져도 오래된 나뭇가지는 투명빛에 물든다. 땅에 꽂힌 외눈박이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몸부림쳤고 하나에만 전념하고 싶어서 애틋했다.  뿌리 뽑혀도 아파하지 않을 것 같기에 살아온 역사가 애닯다. 애틋한 그리움과 애틋한 삶을 평온하게 남겨두었다.  여백처럼.


물들지 않은 감 잎사귀는 진즉에 사라졌고 익다 만 은행잎은 고스라져 나뒹군다. 삭발도 두렵지 않다. 말간 하늘에 수줍음 한 방울 내린 토곡요에 고요가 앉았다. 햇살 좋은 창가에 구름이 고개 내밀어 날리는 꽃잎 여인의 치맛자락을 풀어헤친다. 서른 중반의 초보 엄마는 보란 듯 하늘을 이고 섰다.  최고의 순간을 누르며 위로한다, 너 보다 더 이쁘다고.


아직은 가을색이 아득하다.  



이건 딱 내가 좋아하는 사치다.  예쁜 모습은 아니면서 예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아담하다. 이 얼어 죽을 미적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무리 부자라도 다   누릴 수 없는 청춘의 쓴맛, 아무리 젊어도 누릴 수 없는 중년의 여유. 앞날은 새롭고 세상은 넓다. 노란 은행잎 너도 딱 그렇게 나무 벤치에 앉아 살아남았구나  떨리는 몸짓으로. 다시 빛이 나고 다시 너는 젊음이 오겠지. 세상에 버려진 건 없다. 긴 밤을 홀로 지새우고 새벽녘 차가운 이슬 머금어도 또 밝게 빛날 너는 역시 청춘이다.  


혼자 걷는다.  아스라한 낙엽길이다. 너의 귀한 몸짓과 너의 화려한 색깔에 난 중독된다. 끊을 수 없다.  치명적이다.  날이 밝으면 또 올 거라 해맑게 웃겠지. 살아있는 건 누구라도 아름답듯 수억 년을 말없이 지켜온 나무는 나약한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나도 떨어질 수 있다고,  떨어져야 다시 핀다고.  고요가 내려앉은 벌판에도 하늘이 받쳐주면 아름답게 빛난다고.  


너는 그런 존재다.  



혼자 하늘을 날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야 흩날릴 줄 안다. 기와 담장 아래로 살포시 가을 햇살이 내려앉아 고요를  벗 삼는다.  왜 저리 말라버렸을까, 물 한 모금 적셔 주고 싶다.  하늘이 품어주고 재워주고 그것만으로도 풍족한 삶인데 얼마 안 있으면 너도 바람결에 날아가버리겠다. 너무 고요하면 어쩌나,  세상이 너무 고요하면 햇살이  샘을 낼 텐데. 빛나는 구석을 말하지 않아야겠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달뜬 밤에 나무 사이를 걸어야겠다. 낙엽 물든 가을 나무는 외면하지 않는 볼 빨간 수줍음으로 머물러 줄까.


하나, 둘, 셋~~  찍는다.  


어느 시인은 그랬다. 가을은 갈 게 많아서 가을이고, 씨앗 하나만 품고 다 가시라고, 그래서 가을이라고.  인생의 계절은 모든 계절이 좋다고, 힘든 인생의 날들이 다 희망이라고.  


가을은 즐기는 멋이다.  노란 옷 입고 파란 옷 입고 빨간 가방 메고, 사방을 둘러보면 울긋불긋 화려하지 않은 게 없다. 떨어져도 괜찮아,  날려가도 괜찮아 다시 또 피어나고 또 필 수 있는 너는 씨앗을 품었으니까.


노랗고 붉은

가을은

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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