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린왕자 Nov 21. 2023

지난날이 잠시 부끄러웠소

햇살 따사로운 날  목이 까칠하니 삼계탕이 생각났다. 몸살이 날 징조인가 싶다. 아들에게 몸보신하러 가자 하니  소고기 먹으러 가잔다.  그럴까?



현관 입구를 나서는데 탱자가 예쁘다.  다소곳하게 이파리 끝에 붙어 청순한 젊음을 피어내고 있다.  용케 잘리지 않고 살아났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미쳤을까 탱자가 떨구고 바라보는 돌길이 기름칠한 듯 반지르하다.


소고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무제한이다. 욕심을 부리자면 소고기를 더 많이 먹기 위해 가는 곳이다.  고기 질이 쁘지 않으니 가성비가 좋다. 셀프로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선뜻 나서는 건 식비를 덜어주려는 의도도 있거니와 맛도 나쁘지 않아서다. 자기 먹을 걸 덜어 와 눈치 보지 않고도 배를 채우니 젤 현명한 살아남기다.  

"오늘은 엄마 드시고 싶은 거 먹어요."

선심 쓰듯 앞장서는 아들 뒤로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꽂힌다.


주차장은 만차다. 티켓팅을 해야 한다.  아들이  뛰듯이 먼저 차에서 내린다.  먹는 것엔 진심인 녀석이다.  삶에도 직장에도 저리 좋아서 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부모 입장에서 막연하게 기다리기엔 애써 태연할 수밖에  없다. 대놓고 말하는 것도 부모지만 조심스럽다.




우리 부모는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도 알아서 하라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하는데 네 벌어서 해라'는 식이었지만 전적으로 자식을 믿으셨다. 그 당시의 대다수는 취업을 해서 생활에 큰 보탬이 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던 시절이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우리네는 더욱 그러해야 했다. 하지만 왜였을까, 나는 그런 의무를 져 본 적이 없다. 아마  나보다 더 오빠가 그 역할을 짊어졌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제법 큰 기업에 들어간 오빠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앞길 가는 자식들이 당신들 눈에는 왜 애처롭지 않으셨을까. 무엇을 해도 안타까운 손가락이지만 조바심내거나 '그건 아니야'라고 부정의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이제와 생각하니 고맙다. 그래서 내 자식에도 부모 입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옅은 욕심을 내비칠 뿐.




순서를  기다리며 햇볕 드는 창가에 등을 기댄다.  기다리는 무리 사이에서 깃흘깃 쳐다보는 눈동자에 시선이 간다.  누구시더라?  어디서 뵌 듯 안면은 있는데? 그녀는 조심스레 걸어오는 늘그막의 할머니 손을 부여잡으며 나를 또 쳐다본다.  누굴까? 나는 애써 민망함에 '차에  가 있으마' 하고는 그녀의 시선을 등졌다. 차 문을 열기도 전에 핸드폰을 켜는 간 진동벨이 울려 냅다 뛴다. 이제는 먹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다.  


고기를 기다리느라 손님들이 줄을 섰다. 여유분이 없다 보니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아니, 왜 여유 있게 고기를 준비하지 않을까  속으로 불만을 터트린다. 익숙한 손놀림에 야채를 집는 순간.


"선생님, 저 모르시겠어요?"

"ㆍㆍㆍ."

"ㅇㅇㅇ선생님!  맞죠? 저 ㅇㅇ 엄마예요."

"아~~ 어머니! 반가워요. 잘 지내셨죠."




그녀의 아이가  초4부터 나와 인연을 맺었다. 아이는 작고 똘망똘망했다. 추운 겨울날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태워 수업을 보냈다.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중학교를 들어갈 무렵 그룹에서 혼자 남게 된 아이는 혼자  그이 집에서 수업을 했다.  비좁아서 죄송하다는 어머니 말씀에도 나는 감사했다.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주셨던 것에 고마웠다.  그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도 인연을 맺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일자리를 얻으셨다.  아버지 혼자 힘으론 버거우셨으리라. 그러다 보니 받아야 하는 의료도 갈수록 미뤄졌고 차츰 수업에 빠지는 날도 늘었다.  정리를 해야 했다. 중3을 다니다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문제는 몇 달 후 터졌다.  작은 녀석이 어깨가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무렵, 뾰로통하게 톡을 하는 엄마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무슨 일이냐 물었다. 밀린 의료를 받아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했더니 불만 섞인 말투를 던진다.  


"엄마, 여태껏 애쓰시고 구걸하듯이 저자세로  받아야 하나요? 당당하게 하세요."

맞다.  나는 내가 받아야 하는 몫도 큰소리치며 받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아이에게 비친 내 모습이 잠깐 부끄러웠다. 상대의 입장을 너무 생각해 준다는 것에 나도 저도 불만은 있었다.


"아이야, 엄마가 살아 보니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인정이더라. 돈은 잃으면 잠시 안타깝지만 인정을 잃으니 엄마는 평생 가더라.  너의 말도 맞아. 추운 날 그렇게 고생해 가면서 늦은 밤까지 링거 맞은 투혼으로 이겨내는 걸 봤으니 당연한 거야.  엄마는 그렇게 일했어. 그러나."


작은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내게서 멀어졌다.  




지금은 아이가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갔단다. 세월 앞에 부모도 늙어간다.  우리 앞에서  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단란했다. 아이는 자라서 부모 곁을 떠나고  부모는  혼자된 부모를 돌보고 있다.


내 삶의 팍팍함을 건드리며 오랜 시간을 걸쳐 그녀와의 갈등은 끝이 났다. 당연히 챙겨야 하는 나의 몫이었지만 행여나 가슴 아프게 한 건 아니었을까 가슴 언저리에 불편함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먼저 알아봐 주시는 걸 보면 내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구나 애써 위로했다.  


먼저 일어서면서,

맛있게 드시고 가시라며

진심으로 나의 웃음을 전했다.

작가의 이전글 첫눈은 국화 향기에 스며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