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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Dec 15. 2023

선덕여왕이 걸었을까 이 아름다운 길을

역사의 쓸모 4


지금은 왼편으로 물막이 공사를 했다


경주의 봄을 여행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들르는 아름다운 '숲머리 길'이 다.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진 않았다. 일명 비담길, 선덕여왕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 명활산성에서 진평왕릉을 잇는  숲머리  마을 끝까지 봄이면 벚꽃과 함께 겹벚꽃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진평왕은 신라 제26대 왕(재위 579~632)으로 579년 진지왕이 폐위되며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의 장남이다.  동륜이 일찍 사망하자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후 4년 만에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다.  


진평왕 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분쟁이 많았던 시기이다. 이때 남산성을 쌓고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치는 등 국방강화에 힘썼다.  


진평왕은 지혜로웠으며 의지가 굳고 활달했다 전해진다.  자신의 첫째 천명공주를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과 결혼시킨다.  그들에게서 태어난 이가 훗날 진골 귀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이 되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다.


 진평왕이 죽고 진평왕의 둘째 딸 덕만공주(일설에는 째라고도 한다)가 왕위(632~674)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으로 기록된다. 진평왕에겐 꾸준히 아들이 없었으며 딸만 셋인 것으로 전해진다. 첫째 딸 천명공주와 김용춘의 사이에서 태어난 김춘추가 그의 조카이며 선덕여왕은  진덕여왕(진평왕의 동생 국반의 딸), 진성여왕과 함께 신라 3대 여왕 중 한 명이다.  즉위 전 공주 시절의 기록은 딱히  없지만 즉위 후에는  자신이 왕이 된 것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고 한다.  


신라의 전례를 따진다면 신라에 아들이 없다면 딸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이 그랬다.  즉 진평왕의 사위이자 사촌형인 김용수가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진평왕은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핏줄을 꽤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사실 눌지 마립간 이후 부자상속제가 확립되면서 사실상 사위 계승제는 사라지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647년 1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압했으나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는가?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였다.  


물막이 공사 전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진평왕릉을 만날 수 있다.  봄에는  벚꽃이 예쁘게 피고 벚꽃이 질 무렵엔 겹벚꽃이 또 활짝 핀다. 날짜를 잘 맞춰 가면 벚꽃과  벚꽃을 함께 볼 수 있는 환상적인 아름다움도 누릴 수 있다.  연인이 걸어도 아름다운 길,  혼자 걸어도 아름다운 길, 마음을 비우고 걷노라면 세상의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듯하다.  


지금은  왼편으로 보이는 곳에 수로 공사가 끝났지만 수로 공사가 한창일 때는 예전의 그 아름다운 벚꽃길을 구경할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군데군데 패인 길도 그러했거니와 오래되고 무성한 겹벚꽃 가지를 몽땅 잘라 내 옛멋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려 나간 가지를 볼 때 아팠던 마음이 나라를 지키는 왕의 마음만 했을까마는 잘린 가지들이 백성의 팔과 다리였다면 그걸 지켜본 왕의 마음은 어땠을까.  


찬란했던 겹벚꽃의 아름다웠던 순간이 화려하고 굳건했던 신라의  영광이었으리라.


오래된 것은 가고 새로운 것은 돋는 법. 선덕여왕도 자신을 비호하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구했을 터.


진평왕이 죽기 직전 631년, 이찬 칠석과 아찬 석품이 선덕여왕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에 대한 반발로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 태종에 의해 권위가 추락한 사건도 있다.  642년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위기감이 조성되었을 때, 고구려와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당 태종은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 이웃 나라에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아 더욱 왕권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담과 염종의 반란이 일어난다.  


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낭산 남쪽의 도리천 가운데에 장사 지내라 하였고, 자신이 예언한 날짜에 죽자 유언대로 낭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장사 지냈다.  선덕여왕이 죽고(647년) 진평왕의 동생 국반의 딸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선덕여왕은  아버지를 보러 이 아름다운 길을 걸었으리라. 자신을 따르는 호위무사를 거느리고 겹벚꽃이 살랑이면 코끝으로 전하는 향기를 머금으며 천천히 천천히 봄향기를 즐겼으리라.  잠시 선덕여왕이 되어 봄바람에 간질임 타듯 두 팔 벌려 심호흡해  본다. 봄이, 경주의 봄은 여기에 머문 듯하다.

진평왕릉

선덕여왕길이 끝나는 곳에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릉은 경주시 보문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명활산, 남쪽으로는 보문사 터가 있으며 서쪽에는 낭산이 솟아 있다.  주변엔 몇 그루의 나무만 서 있을 뿐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규모로 보아 왕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한다.    터가 넓어 나무그루터기 아래 자리를 깔고  역사도 배우고 경주의 멋도 즐기는 피크닉 장소로도 좋다.  


진평왕릉의 봄은 연두가 푸릇푸릇 선덕여왕길과는 또 다른 멋을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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