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입자 할머니 그리고 환자 X에 대해
오늘 아침 전세사기 뉴스를 보다가 몇달 전 아파트 전세 세입자 구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작년 10월경 기존 아파트 세입자분이 전세 만기가 되어서 새로운 세입자 분을 구하였는데, 그 과정이 꽤나 스트레스였다. 전에 살던 세입자분은 집을 험하게 쓰셔서 나름 신축인 아파트였던 그 집은 성한 곳이 없었다. 이 외에도 부족한 전세 보증금 등을 구하는 문제 등으로 고생을 했는데, 고생 끝에 수다쟁이 할머니 한 분과 전세계약을 하였다.
처음 뵌 날부터 마지막 만남까지 인상이 깊은 분이었다. 3차례 정도는 직접 만나 뵙기도 하고, 몇 차례 통화도 하였었다. 수다쟁이이신 할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끊임 없이 자신은 청담동에도, 강남에도 빌딩이 있고, 자식들은 트리마제 등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거주 중이라며 내게 이야기를 했다. 다른 이야기는 일체 없이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 하셨다. 입주 하기 전날 몇 가지 집안 물품들을 손봐드리러 갔다가 할머니를 마주쳤는데, 할머니는 그날도 끊임 없이 재산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이렇게 나이든 어머니를 돕는 할머니의 자제분들은 뵙지를 못했다. 전세금 이체도 하실 줄 몰라 그 큰 금액을 현금으로 들고 오신 분이었는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환자 X가 생각났다. 환자 X는 진료에 매우 성실했는데, 한편으로는 매 진료 때마다 정신과의사의 무능력함을 토로하였다. 자기도 무능력하지만, 치료를 아무리 받아도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고, 이전 정신과 의사와도 1년 이상 진료를 보았는데 나아진 것은 없다며 이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수도 없이 물어보는 분이었다.
동료 Y는 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거면 치료를 받지 말지 기껏 열심히 진료받으러 와서는 왜 저말만 수도 없이 반복하는 지 모르겠어요”
환자 X의 가족들도 내게 말했다. “가끔은 X가 자신은 나아 질 수없다는 말을 끊임 없이 우리에게 반복하는 건가 우리를 화나게 하려고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얼핏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한 두번, 혹은 자신이 기분이 상할 때마다 그런다면 그런 의미일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매순간 한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나는 보호자에게 X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함을 심각하게 느끼는지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니깐 쉽게 말하자면 환자는 그 깊은 무기력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힘든 상황이라, 그 힘듦을 저렇게 분출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환자의 말에 화가 나는 크기가 클수록, 사실 환자의 고통은 그만큼 더욱 큰 상황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세입자 할머니도 계약 날에만 돈 자랑을 했다면, 사실 초면에 왜이렇게 돈자랑을 하나, 졸부이나 하고 짜증이 나고 말았을 것 같은데, 내가 입주전 날 집을 한번 더 점검하러 간 날에도, 통화하는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도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하는 것이 환자 X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에게 외로우신지, 뭐가 불안하신 것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니깐 말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릴수도 있다. 그냥 자랑하기 좋아하는 할머니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환자 X를 떠올리게 만든 세입자 할머니에게 새해를 맞이해 연락을 드렸다. 새해 건강하시고, 그 집에서 머무시는 동안 앞으로 항상 좋은 일만 있으셨으면 좋겠다는 인사말과 함께, 필요한 도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편안하게 연락 주시라고 말이다.
세입자 할머니에게
계약서를 쓰기위해 만난 첫 날, 이런 큰 돈이 있냐는 식으로 제게 자랑을 하는 할머니에게 사실 저는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표현이 서툰 할머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랑이었더라도 좋아요. 자랑이었다면 얼마나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으면 이렇게 끊임 없이 이야기 할까요.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도 항상 죽어야 한다고만 해서 엄마랑 자주 다투셨는데, 그때는 그게 왜그런지 몰랐던게 후회가 됩니다.
할머니는 저에게 끊임없이 돈자랑을 하셔도 좋습니다.
생각해보니 환자 X말고도,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구나 싶다.
사실 얼마전 매번 만나거나, 카톡으로 연락을 하거나 모든 순간들을 와이프랑 싸운이야기만을 털어 놓는 친구 Y놈에게 와이프랑 이혼할거 아니면 그만 와이프 욕을 내게 하라고 짜증을 냈는데, 어쩌면 친구 Y도 와이프 욕을 하고 싶었던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할머니도, 친구 Y도 진짜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