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 간 정신과 의사

by Woodfire

방송국에 간 정신과 의사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연락이 하나 도착했다.
“○○ 방송국입니다. 정신건강 전문가 관련 섭외 건으로 연락드립니다.”

스팸인가 싶었다. 진짜? 나 같은 사람한테 방송 제의가 온다고?
메일로도 비슷한 내용이 와 있었는데, 그마저도 처음엔 의심스러웠다.
진짜 방송국 도메인이 맞나? 설마… 이것까지 낚시는 아니겠지라는 마음이랄까?
(참고로 나는 몇 번 보이스 피싱을 당할 뻔한 이력이 있다…)



결국 메일을 열고, 담당자에게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곧 나는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해도 되나?’
‘말 더듬으면 어쩌지?’
‘괜히 나갔다가 민망한 거 아니야?’

머릿속에서 하지 마라와 한번 해보자가 몇 번이나 싸웠고,
주변 사람들은 좋은 경험일 테니 나가보라는 말에
결국 ‘그래, 해보자’ 쪽의 손을 들어줬다.



녹화 당일, 생애 처음으로 분장실에 앉았다.
메이크업 선생님이 능숙하게 얼굴을 다듬어주는 동안, 나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바라봤다. 하얀 조명 아래에서 내 얼굴은 왠지 모르게 패왕별희처럼 새하얗게 떠 있었고,

메이크업 선생님이 얼어붙은 나를 풀어주려

"XXX 연애인 닮은 것 같아요"

"말씀 잘 하실 것 같아요"

등 등 여러 농담을 건네주었지만

나는 로봇처럼 “아닙니다”라고만 딱딱하게 답을 했다.



“선생님, 녹화 들어갈게요!”



제작진의 말이 떨어지고, 녹화는 시작되었다.
나는 외래 첫날보다 더 긴장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문득 대학교 시절, 힙합 동아리 공연 때 무대에 올라가 가사를 까먹고, 박자를 놓치고,
내려와서 이불킥 했던 그날의 내가 오늘도 내 안 어딘가에서 심장을 두드렸다.



평소엔 농담도 잘하고, 썰 푸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카메라 앞에서는 그게 전혀 안 됐다.
말은 꼬이고, 마음속 대사는 반도 꺼내지 못했다.
익숙한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웃긴게... 그렇게 긴장되는 와중에도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건 진행자 선생님의 말솜씨였다.

내 말이 엉키면 자연스럽게 받아주시고, 흐름이 끊기면 부드럽게 이어주셨다.

긴장한 틈 사이로 이런 감탄이 스쳤다.


“와, 저런 목소리와 말하기는 어디서 배우는 걸까…”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촬영을 망쳤다는 생각보다 진행자 분의 발성이 너무 신기해서
바로 휴대폰으로 ‘발성 수업’을 검색했다. 이런 저런 유튜브도 보고, 수업 신청 페이지도 눌러봤다.

하지만, 문의는 남기지 않았다.

또 일을 벌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나도 조금은 자제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실수도 있었고, 아쉬움도 많았지만 막상 지나고 나니, 조금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그때 무대에서 창피했던 기억을 조용히 품고 살아가고 있었구나.
완전히 잊은 줄 알았지만, 어떤 낯선 상황 앞에 서면 그 기억이 다시 몸을 타고 올라오는구나.



그날의 나는 좀 어색했고, 말도 더듬었고, 하고 싶던 이야기의 반도 못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은 조금 뿌듯했다.

잘했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별거 아닌 일에도 도망치던 내가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괜찮았다.



앞으로도 비슷하게 떨고, 또 어설프게 말하고, 돌아와서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해봤다는 기억은 조금 오래, 내 안에 남을 것이다.

말 더듬은 것도 아마 세트로 따라오겠지만.

...그래도 그날의 나는 거기 있었고,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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